엄마 음식이 필요한 도시, 가족이 되어 주는 식당
단골이 좋은 이유
내가 다니는 단골 헤어숍이 있다. 신촌 세브란스병원 건너편의 데이앤라이프인데, 몇 년 전 연대 루스채플에서 죠이 모임에 강의 부탁을 받아 급하게 머리 깎을 곳을 찾다가 이곳에서 손질받은 뒤 단골이 되었다. 집에서 멀고 일하는 곳과 떨어져 있어도 커트할 때쯤이면 이곳에 간다. 내 머리를 손질해 주는 실장님과 말이 통하는 친구가 되었고 계속 다니다 보니 서로의 취향과 특성도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를 기억해 주는 가게, 인사말 외에 몇 마디 주고받을 수 있는 곳이 좋아졌다. 가격 싼 곳만 찾다가 단골을 찾기 시작한 것은 살아가면서 그만큼 마음에 빈 곳이 많아지고 인간적인 정이 그리워졌기 때문이다. 머리 깎을 때만큼은 친구가 되어 주는 곳에 맡기고 싶어졌다.
나는 머리가 자라면 힐링과 기분전환을 기대하며 단골 헤어숍에 예약한다. 순한 제품으로 머리를 감겨주고 피로를 풀어주는 지압과 상쾌한 아로마 향 효과도 받을 수 있다. 생각보다 비싸지 않고 가끔 디톡스 서비스 등 특별한 선물도 받는다. 내 머리를 커트해 주는 실장님은 종종 일본 여행을 다니고 TV는 거의 안 보고 독서를 즐기는 분이다. 영화 얘기를 건네다가 그분이 내게 추천해 준 영화가 <심야식당>이다. 꼭 보라고 하여 마음에 새겨두었는데 고맙게도 어제 OCN 주말영화에서 <심야식당> 1편을 편성해 주었다.
마스터, 항상 먹던 걸로 줘
나는 단골 헤어숍에 늘 알아서 해달라고 한다. 이 얘기가 디자이너들에겐 가장 어려운 주문이라고 하지만 서로 친밀감이 형성되면 신뢰감이 쌓여 알아서 해달라는 말로 충분하고 결과도 만족한다. 심야식당에 오는 손님들도 그렇다. 주인이자 셰프인 마스터에게 항상 먹던 걸로 달라고 한다. 이미 서로 깊이 교감하며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며 몇 번을 울컥했는지 모른다. 도시에 살면서 소외되는 아픔과 사연들, 엄마 품 같은 따뜻한 이해의 공간과 식탁이 얼마나 그리운가. 내 마음을 다 들어주고 이해해 줄 대상, 심야식당은 외로운 이들의 필요와 치유를 채우고 있다. 누구라도 받아주는 곳, 아픔을 이해하고 보듬고 원하는 그 이상의 음식과 경청으로 힐링시켜 주는 곳. 현대인들에게 심야식당은 만화 같은 공간이지만 사실 교회가 이런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심야식당의 마스터에게 성직자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장발장의 미리엘 신부 같은 용서하는 아버지이기도 하고, 연애에 배신당한 여자들에게 따뜻한 가족이기도 하고, 사회에서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큰 사람의 모습이기도 하다.
인간을 존중하는 법을 아는 사람의 음식
신주쿠 하나조노 근처의 골목에 마스터 혼자서 운영하는 작은 밥집이 심야식당이다. 0시부터 아침 7시까지 영업한다. 메뉴는 돼지고기 된장국 정식, 맥주밖에 없지만 원하는 음식을 말하면 가능한 한 만들어 준다. 밥집의 주인은 얼굴에 베인 상처가 아문 흉터가 있지만 그의 배경과 이전의 모습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과묵하지만 손님의 상처 난 마음을 위로할 음식을 예민하게 파악하여 내놓는 의사 같은 요리사다. 심야에만 영업하는 이 식당에는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 단골로 찾는다. 이미 마스터와는 친구 그 이상이다.
그들은 나이 많은 게이, 자부심 강한 스트리퍼 댄서, 고교 야구 선수 출신의 야쿠자와 그의 부하, 식탐이 심한 여자, 정이 많은 유흥업소 종사 여성, 유명한 요정의 여주인, AV 남성 배우, 게이바를 운영하는 트랜스젠더 등이다. 도쿄에 정착했지만 모두 지방에서 올라와 부대끼고 애쓰며 가슴이 허전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마스터의 음식에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면서 자신이 어떤 모습이든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그의 넉넉함에 허전한 가슴을 채우는 사람들이다. 심야식당이 받아주는 이러한 손님들이 곧 우리의 이웃이면서 관객인 나 또한 그들처럼 허전하고 괴로운 도시인이기 때문에 공감과 울림이 깊었다.
외로운 집에 들어가기 전 허전한 사람들끼리 심야식당에서 혼밥을 즐기며 서로에게 마음을 연다. 마스터가 내놓는 기막힌 음식에 감동하면 옆 자리의 사람이 자신도 같은 요리를 해달라고 주문한다. 그들이 먹는 마스터의 음식은 마음을 치료하는 매개체이다. 서로 같은 음식을 먹다가 부족한 사람들이 친해지고 때로는 짝을 만나 연애도 일어난다. 결핍을 가진 사람끼리 정을 나누고, 고통을 호소하고, 서로 참견도 하지만,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소동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 모든 군상들 속에서 마스터가 균형을 잡아주기 때문이다. 저런 인간도 여기 오는구나 하며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한 명 한 명 받아주고 또 먹으러 오라고 따뜻한 말로 보내는 마스터를 보며 인간을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고향이 그리운 이를 위한 보양식, 마밥
영화 <심야식당> 1편의 에피소드 중에 '마밥' 편이 가장 심금을 울렸다. 돈을 벌기 위해 상경한 미치루는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할머니를 그리워하며 무일푼으로 하루하루 견뎌간다. 배가 고파서 심야식당에 들른 그녀의 허기진 모습에 마스터는 빨리 내놓을 수 있는 음식부터 차려주면서 시간이 걸리는 마밥을 내준다. 잠깐 부엌에 들어간 사이 미치루는 먹튀해 버린다. 그녀가 가지런히 정리해 놓은 그릇을 보는 마스터의 얼굴에는 조금도 화가 나 있지 않다. 오히려 손님들이 분개한다. 가게 문을 열기 전에 미치루는 마스터를 찾아와 용서를 빈다. 자신이 가게 일을 도우며 음식값을 보상하겠다고 하지만 마스터는 성공해서 갚으라며 마음 쓰지 말라고 한다. 잠깐 가게에 들어와 쉬어가라고 했는데 미치루는 어디서 배웠는지 마스터의 요리 칼을 갈아준다. 적극적으로 보상하고 싶어 하는 그녀를 마스터는 받아준다.
<국화와 칼>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일본인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들의 문화 안에 '기리', '기무', '온'이라는 용어가 있다. 바람에 날린 모자를 누군가가 주워주면 그에게 반드시 보답을 해야 한다. 보답하기 어려운 호의를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며 타인에게 신세 지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마스터는 먹튀녀인 미치루가 미안해하지 않도록 자신의 손목 관절이 좋아질 때까지 있으라고 하고, 목욕값을 주면서 혼자서 운영해 온 <심야식당>에 조수로 사용한다. 물론 매일 일당도 지불하고 2층에 자신이 쓰던 숙소도 내어준다. 미치루에게 마스터는 척박한 도쿄에서 인자한 가족이 되어 준 것이다.
혼자이던 이에게 집이 되고 가족이 되는 곳
미치루는 주방 일을 해본 경험이 있다. 마스터는 그녀를 조금도 엄격하게 가르치지 않는다. 미치루 스스로 알아서 <심야식당>의 대표 요리인 계란말이를 만들고, 마스터는 맛을 내는 간단한 법만 전수한다. 미치루를 신뢰하고 인간적으로 대해 준다. 손님들에게도 미치루가 만든 것을 맛보게 하여 식당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한다. 마스터를 좋아하는 요정 주인만 조금 쌀쌀맞게 미치루를 대한다. 마스터는 이 모든 감정선을 다 읽기라도 하는 듯 푸근한 미소만 짓고 있다. <심야식당>은 미치루로 인해 활력이 생기고, 가게 문을 열기 전에 음식 재료를 사러 갈 때부터 마스터와 동행하며 자신의 고향에서 먹던 국수도 만들어 본다.
그녀는 2층의 방 발코니에 풍경종을 달고 자신처럼 도쿄에서 배달부로 살아가는 여자를 위로한다. 미치루를 데리러 온 남자가 한바탕 소동을 일으킬 때 손님들과 동네를 지키는 순경까지 합세해 그녀를 돕는다. 이제 <심야식당>은 외로운 그녀의 고향이자 가정이 되었다.
마스터가 손목 치료를 받고 칼질을 편안하게 할 수 있게 되자 미치루는 계속 신세를 질 이유가 사라졌다. 당연히 마스터는 계속 있어도 된다고 하지만 미치루는 자기 생각만 할 수 없다. 그런 미치루를 요정 마담이 자신의 가게 주방 직원으로 취직시킨다. 심야식당의 모든 손님은 약자의 편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가족과 다름없다. 미치루는 아버지 같은 마스터의 가게에서 엄마 같은 분을 만나 큰 주방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심야식당에서의 마지막 날, 그녀의 앞날을 축복하며 마스터는 먹고 싶은 것을 말하라고 한다. 그녀는 쾌활하게 마밥이 먹고 싶다고 하고 마스터는 정성을 다해 마밥을 해준다. 맛있게 그릇을 싹싹 비우는 미치루를 보며 나는 눈물이 쏟아졌다. 이미 그들은 아버지와 딸의 모습이었다. 마스터는 그녀가 사놓은 풍경종을 선물로 달라고 한다. 이 종소리라도 들어야 덜 허전할 것 같다고... 꼭 딸을 시집 보내는 아비의 얼굴이다. 음식과 함께 화면에 흐르는 정이 이 영화의 백미이다.
미치루는 <심야식당>의 모든 에피소드가 끝날 때 가게에 찾아온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5단 도시락에 풍성하게 싸와서 손님들에게 대접한다. 그녀는 심야식당에서 마스터를 만나 성장하고 그립던 할머니 같은 가족을 얻으면서 도쿄는 또 다른 고향이 되었다.
영화의 시작과 엔딩에 묵직한 중년 남자 톤의 노래가 흐르면서 도쿄의 번화한 거리를 비춘다. 허전하고 괴로운 누구라도 심야식당에 오면 인간이기에 갈급한 정을 느낄 수 있다. 소외된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 줄 마스터의 음식,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외로움과 상처와 고통이 가득한 도쿄에서 맛보는 심야의 한 끼에는 사랑, 위로, 최고의 선물, 웃음, 치유, 공감, 그리고 가족이 있다.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선배로 고향의 엄마로 힘이 되는 친구로 가까이 있는 마스터의 얼굴을 자주 보고 싶다. 그의 눈에 있는 상처가, 상처 입은 치유자를 떠올리게 한다.
마스터의 음식을 보는 즐거움과 결핍과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 치유되어 가는 과정에서 내 아픔도 조금씩 치유되는 것을 느낀다.
<심야식당> 1편 OST - 스즈키 츠네키치, 추억(思ひで)
곡 전체 듣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