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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교진 Mar 27. 2023

전신마비 시련을 극복한 치과의사, 이규환 교수

세상에 없던 치과의사에게 듣는 삶의 희망

미래가 탄탄한 인생에 닥친 불의의 사고

키 188cm의 듬직한 체격, 공부뿐만 아니라 운동도 잘하고, 학창 시절 내내 리더십을 발휘하며 부러운 것 없던 치대생 이규환은 하루아침에 전신마비 중환자가 되었다. 중도 장애의 시련을 겪고 법조인 혹은 상담사로 재기하는 사례는 볼 수 있지만, 전신마비의 고통을 견디고 치과의사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이뤄낸 사례는 전 세계에도 유례가 없다.

국내 최고의 병원에서 진료하기까지 얼마나 큰 노력과 숱한 시련이 있었을까? 치의대 공부와 진료는 어떻게 해냈을까? 자신에게 닥친 끔찍한 시련을 받아들이고 감내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주신 도움은 무엇이고, 그는 하나님과 어떻게 화해했을까? 

이규환 교수는 TV 출연은 겸손히 고사하지만, 신앙 인터뷰는 최대한 시간을 내준다. 자신처럼 고통스럽고 암담한 현실에 처한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하기 위해서다.    


       

어제보다 조금만 더 따뜻한 사람이 되자

진료실에 들어가자 의사 가운을 입고 전동휠체어에 앉은 이규환 교수가 환한 웃음으로 반겼다. 인자한 목회자의 인상과 음성을 지녔다. 근황이 어떤지 물었다.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저를 본 분들은 제 인생철학을 ‘지독하게 살다 보면 길이 열린다’로 알고 계시는데요. 아닙니다. 제 삶의 이정표는 ‘어제보다 조금만 더 따뜻한 사람이 되자’입니다.” 

어제보다 조금 더 따뜻한 사람이란 이 교수의 표현에 마음이 훈훈해졌다. 그 어떤 삶의 고충도 녹아내리는 듯했다.      

“저는 하나님이 부르시기까지 절실한 심정으로 노력해야 해요. 의사로서 최신 지식과 스킬도 중요하지만, 성도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따뜻한 사람이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제보다 조금만 더! 많이도 아니고요. 조금만 더 따뜻하게 환자를 대하며 살고자 해요.”     

건강하고 똑똑하고 거칠 게 없던 청년이 갑자기 전신마비의 불운한 사고를 겪었다. 인간으로 넘어서기 힘든 한계를 수십 배 이상의 노력을 쏟아부으며 버텨냈다. 이 교수가 인생모토로 따뜻함을 삼은 것은 신앙으로 영근 마음이 아닐까?     

“솔직히 다치기 전에는 저밖에 몰랐습니다. 공부 잘했고, 키 컸고, 운동도 잘했어요. 학교에서는 반장에 학생회장을 놓치지 않으며 리더십을 발휘하며 지냈어요. 치대에서 과 대표도 맡았고요. 겁나는 게 없었죠. 그게 자만이었습니다. 제가 다치고 나서 그것도 신체 기능을 다 잃어보니 저처럼 삶을 포기하고 싶은 분들이 보이고 겸손해지더군요.”     

 


사고가 난 그날의 기억

2002년 치과대학 본과 3학년 때다. 운동을 즐기던 그는 수영장에서 다이빙을 하다 목이 부러져 꺾이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그 끔찍한 일은 불현듯 벌어졌다. 2주 가까이 의식 없이 누워 있다가 눈을 떴다. 중환자실 병상이었다.      

“눈 떴을 때 신기하게도 머리가 개운했어요. 치과 공부를 하며 고된 나날을 보내다가 본의 아니게 2주 가까이 잠들어 있다 보니 피로가 씻겨 머리가 맑아진 거예요. 이 상태로 공부하면 뭐든 해내겠다 싶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신경과 운동 기능에 관련된 척수 손상으로 중증장애인 선고를 받았다. 숨도 못 쉴 만큼 꼼짝할 수 없는 몸에 호흡근까지 마비된 상태를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끔찍했다. 꿈이기만을 바랐고, 깨어나면 계속 독한 수면제를 요청해 잠으로 숨고 싶었다. 병상 옆 폴대에 걸린 온갖 약병의 생명 유지 장치들이 그의 현실이 꿈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하루아침에 목 아래 아무것도 없는 상태의 자신을 인정해야 했다. 꿈에서 깨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가져 본 억지 희망은 아무 소용없는 고문이었다. 약을 먹어도 악몽 같은 현실로 돌아왔다. 제발 살려달라고 눈물 콧물 흘리며 부르짖었다. 점차 기도가 바뀌었다.     

“제발 나 좀 죽여주세요. 살기 싫어요. 제발 나를 데려가주세요.”     

몸이 안 움직이니 죽어 보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현실을 부인하는 과정을 지나 분노했다. 대대로 믿어온 하나님께 화가 났다. 할 수 있는 욕은 다 쏟아부었다.    


      

죽고 싶은 현실을 마주할 힘을 준 독서

“몸이 기적처럼 회복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현실을 부인하는 단계가 지나니 분노의 욕이 나오고 죽고 싶어지더군요. 아무것도 하기 싫고 먹기도 싫고 생각도 하기 싫고요. 그냥 이대로 어떻게 되겠지, 하며 포기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절망의 시간을 어떻게 견뎠을까? 정신은 멀쩡한데 24시간을 병상에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하는 중환자실은 전쟁터였다. 생사를 넘나드는 온갖 소리가 들렸다. 죽음이 가까이 있는 그 소음을 참고 견뎌내는 게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간호사에게 요청했다.      

“제발 책 좀 읽어주세요. 정신 좀 다른 곳에 돌릴 수 있게, 만화책이든 소설책이든….” 

3교대로 일하는 중환자실 간호사는 착한 나이팅게일이었다. 그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었다.      

“처음에 15분에서 30분 정도 책을 읽어주셨는데 좀 더 친해지면서 매일 한 시간씩 읽어주셨어요. 주치의 교수님은 좋아지지 않는다고 했어요. 수시로 열이 40도 이상 오르고 호흡도 나아지지 않아서 삶을 포기한 상태였죠. 그런데 간호사님이 읽어주신 책 때문에 살았어요. 성경 말씀뿐만 아니라 인터뷰집이나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게 하는 내용의 책에서 힘을 얻었어요.”     

그는 책을 통해 여러 고난의 인생에 집중하며 삶을 추스를 수 있었다. 중환자실에 비치된 책은 모두 도움이 되었다. 지금 인터뷰에 열심히 응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인생을 포기하고 싶을 때 여러 책의 좋은 메시지에서 힘을 얻었듯이, 누군가에게 전환점이 되는 희망을 전달하고 싶다.     

“절망의 깊은 어둠에서 이겨낸 경험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다녀오려 해요. 저처럼 삶을 포기하고 싶은 누군가에게 희망을 드릴 수 있다면요.”          



내가 네 옆에 있겠다고 말씀해 주신 하나님

척수 손상 장애는 회복되지 않는다. 전신마비의 몸으로 평생을 살게 된 그는 하나님께 분노했지만, 절실하게 기도할 대상도 하나님뿐이었다.

“저 좀 살려주세요, 여기까지 고생하며 견뎌왔는데 지금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기도하니 마음이 편해지는 거예요. 그때 주님이 ‘내가 네 옆에 있다’고 얘기해 주셨습니다. 회복될 수 없는 몸으로 왜 이토록 힘들게 살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에 주신 응답이었어요. 제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다면 응답과 평안은 없었을 거예요.”     

절박하게 기도하고 의지하는 것밖에는 살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에게 옆에 있다는 말씀으로 평안을 주셨다. 자기 고통을 수용하는 혹독한 과정에서 그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확신했다. 이루어 달라고 바라기만 하고 주저앉아 있었다면 그 말씀을 듣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서 기도했을 때 옆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      

복학한 뒤 학기 중에 큰 수술을 두 번 했다. 수술실에 들어간 뒤 살아서 못 나올 수 있는 상태였다. 생과 사의 경계를 오가며 마취에서 깨어 비몽사몽간에 기도했을 때 평안이 몰려왔다. 그때도 주님은 “내가 네 옆에 있다”라고 위안을 주셨다. 마음의 평안, 그것이 전부였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고 싶은 데 쓰시라고 저를 내어드립니다. 현재는 아픈 사람들을 도우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데 순종하며 살고 있고요. 만약 하나님이 내일이라도 제게 다른 길로 가라 하시면 갈 겁니다.”          





법조인으로 전향하라는 조언에도 치과의사가 되기로 결심하다

살아보자고 마음먹은 그에게 목표가 필요했다. 

“언젠가는 죽을 몸이니 그때까지 하고 싶은 거, 원 없이 하며 후회 없이 살아보자고 결심했어요. 중도장애인이 법조인으로 재활한 선례가 있으니 좋은 머리로 변호사가 되라는 얘길 들었지만, 제게는 치과의사가 되는 게 확실한 목표이자 후회 없는 결심이었어요.”     

치과의사의 꿈을 포기하면 가슴에 응어리가 남을 것 같았다. 무모해 보여도 도전하기로 하고 파고들었다. 1년여의 병원 생활을 한 후 복학은 쉽지 않았다. 학교는 모든 것이 사고 전과 똑같은데 그만 변해 있었다. 1년 전 펄펄 날던 그가 휠체어를 타고 있고, 무엇보다도 손을 제대로 못 쓰는 치대생이었다.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도 부족했다. 학우들은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큰 사고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어도, 이렇게 심각한 중증장애인으로 복학할 줄은 예상 못했다.      

“다들 불가능하다고 했어요. 그러나 수천 번을 생각해도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치과의사였어요. 장애인으로 자퇴하고 다른 길을 찾는 것은 한이 될 것 같았죠.”      

목표가 분명한 제자를 응원해 준 교수도 있었지만, 반대한 분도 있었다. 학점 주기 어렵다, 졸업 어렵다고 하신 분들의 말씀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손도 못 쓰는 치과의사가 어딨으며, 그런 몸으로 무슨 치료를 할 수 있겠는가?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었다. 그럴수록 그는 더 절실해졌다. 자신이 해야겠다는 절박함만 가득 차올랐다.     



배려받으며 경쟁해야 하는 위치에서 넘긴 죽을 고비

실습은 어떻게 했을까? 손을 고정하는 치과 의료 도구를 제작했다. 지독하게 버티니 길이 생겼다. 도구를 놓칠 것 같으면 자기 손이 다치는 쪽으로 수만 번 연습했다. 치아 깊이를 적절히 조절하며 치료할 수 있었고, 눈을 감고도 위치를 잡을 수 있을 만큼 숙달되었다. 건강한 동기들에 비해 열 배 더 노력했다.      

“비장애인만큼 하면 결코 이룰 수 없어요. 지금도 비장애인 의사가 한 시간 연습하면 할 수 있는 일을 저는 10시간을 합니다. 제 분야에서 최고 수준이 되도록 실력을 갖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강의를 듣고 실습 훈련을 하는 동안 그는 온종일 앉아서 버텨야 했다. 정신은 견디겠는데 골반이 무너지고 엉덩이가 짓물러 살이 녹아내렸다. 하루는 공부 마치고 오다가 휠체어에서 그대로 기절한 적도 있다. 병원에서 패혈증 진단을 받았다. 욕창을 방치해서 균이 온몸에 퍼진 것이다. 엉덩이에는 주먹 하나가 들락날락할 크기의 욕창이 있었다. 수술하고 엎드려 있어야만 살 수 있다고 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다들 불가능하다는 길에 우격다짐으로 들어와 버텼는데 욕창 때문에 휴학하면 더는 복학할 수 없었다.     

“담당 교수께 간청했어요. 한 달 후면 방학이니 그때 수술할 수 있도록 목숨만 붙어 있게 해달라고요.”     

온갖 독한 항생제와 진통제를 맞아가며 수없이 오한과 기절을 반복하며 버텼다. 정신이 어질어질했고, 욕창이 난 곳은 진물과 고름이 가득했다. 솜을 상처 구멍에 채워 넣으며 공부했다. 그리고 그의 원대로 방학 때 수술할 수 있었다.      

“절대 저처럼 하지 마세요. 목숨 걸며 견딘 것은 무모했어요. 저는 선례가 없어서 맨몸을 맨땅에 부딪히며 견뎠지만, 이렇게 정신을 잃어가며 참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그는 자신처럼 지독하게 참아가며 견딘 건 좋은 방법이 아님을 강조했다. 자신이 겪은 고통과 비슷한 일을 겪은 선배를 찾아가서 충분히 듣고 견디는 방법을 택하라고 했다. 위험하게 부딪치지 말고 헤딩을 하려면 꼭 헬멧을 쓰라고 조언한다. 이규환 교수는 선배가 없는 길을 홀로 개척하며 광야에 지도를 그린, 처음 사람이다.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아서 무식했어요. 내가 하고 싶은 것 하고 죽자는 심정이었죠. 내가 죽는 순간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치는 순간이라고요. 하고자 하니 주위 분들이 도와주셨어요. 가족, 교수님, 응원해 준 선후배와 동기들에게 감사해요. 치과의 중에 뇌병변장애가 있는 분도 계십니다. 이렇게 장애를 견디며 전문의가 된 분이 많아지면 더 건강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공부를 계속하다

“무기가 필요했어요. 중증장애인 몸으로 살아가려면 남들만큼 하면 안 됩니다. 그저 배려받으며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비장애인인 전문의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결심으로 평범한 수준의 공부를 하면 안 된다는 비장한 마음이 있었어요.”      

그는 열 배 이상의 노력과 과정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귀가하면 침대에 엎어져 뚫어놓은 구멍으로 잠들 때까지 책을 본다. 절박함이 그를 계속 공부하게 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그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뚫고 나갔다. 지금도 연구 논문을 쓰고 학회에 참석한다. 비슷한 수준의 노력은 그에게 모자라는 것이다. 매 순간 열 배 이상의 투지가 들어간다.          



분당서울대병원의 치과의사가 되기까지

“현실적으로 제가 채용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인정하면서 100여 개 병원에 지원했습니다. 제가 병원장이었어도 채용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그는 떨어져도 좌절하지 않고 계속 지원서를 넣었다. 자신이 후회 없이 사는 길이 치과의사였기에 언젠가 한 번은 기회가 온다고 믿었다.     

“계속 떨어지다 보니 오기가 생겼습니다. 면접장에서 나를 붙일지 떨어트릴지 알 수 있었어요. 열정을 보이는 것만이 유일한 강점이었습니다.”      

분당서울대병원 면접을 본 후 관계자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귀찮아서 안 받는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꼭 한 번은 기회를 줄 거라고 희망했다. 감사하게도 분당서울대병원은 장애의 몸보다는 실력 위주로 채용하는 마인드가 있었다.      

“기회를 잡으면 준비되어 있었어요. 병원장님이 테스트해 보기로 하신 거죠. 무난히 진료를 해내는 제 모습을 보시고 채용이 결정되었습니다.” 



진료를 거듭하며 얻은 단단한 마음

이 교수는 예방치과학, 통합치의학 전문의로 최고라는 얘기를 들을 만큼 실력을 겸비한 치과의사로 알려졌다. 첫 환자를 진료한 순간이 궁금하다.     

“처음 진료할 때 어떤 할아버님이 오셨어요. 저를 보시더니, 병신이 진료하네, 이 병신 뭐야? 내가 이 병신한테 진료받으러 여기 왔냐, 하며 가셨습니다. 재수 없다고 침 뱉는 분도 있었죠. 욕은 엄청 많이 들었어요. 10명의 환자 중 7~8명은 욕하고 화내며 가셨어요. 감사하게도 한두 명은 머뭇거리며 진료를 맡겨주셨습니다. 저는 먼저 얘기합니다. 진료가 좀 느립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꼼꼼하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6개월여 진료하니, 일부러 찾아오는 환자가 생겼다. 진심이 통한 것이다. 선생님만큼 꼼꼼하게 잘 치료하시는 분 없는 것 같다는 칭찬도 자주 듣는다. 요즘은 최고의 치과의사라고 평해 주시는 분도 많다.     

“타인의 평가와 시선은 저만 신경 쓰지 않으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열심히 진료만 하고, 다른 사람의 평가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내가 만족하고 행복한 일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타인의 속마음은 중요하지 않아요.”


이 교수는 하루만 지나면 진료실에서의 기억을 모두 잊는다. 좋은 일에 감사하고, 안 좋은 일에 가슴 아팠어도 감정을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장애인 의사로 경험하는 부정적인 일들에 휘둘리지 않는다. 지금은 환자들이 먼저 찾는 의사가 되었다.      

“저는 하루만 살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하루 좋은 일도 안 좋은 일도 생기지만, 모두 한순간입니다. 상한 감정을 오래 갖고 있으면 제 마음만 다치고 몸이 안 좋아집니다. 그런 과정을 견디면서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더 따듯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순응하는 삶은혜에 부끄럽지 않은 삶

“언젠가 하나님이 저를 부르시면 열심히 살다 왔다고 자랑할 겁니다. 잘 살아냈구나 하는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제 옆에 계신다는 것을 알기에 분명히 천국에 갈 거예요. 그래서 당장 죽어도 기분 좋습니다. 하나님께 자랑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려주신 은혜에 부끄럽지 않은 치과의사로서 떳떳하게 사명을 다할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이 교수의 인생 방점은 전신마비에 있지 않고, 세계 최고의 치과의사로 세우신 하나님의 함께하심에 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라고 항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꿈을 가지고 이루어 내고자 하는 인생에 함께하신다. 그런 숭고한 인생의 치열한 과정에서 기적을 발견할 수 있다.


_글 황교진 / 신앙계 2023년 4월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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