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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교진 May 30. 2023

모교인 이화여대에서 인생 3막 연, 이지선 교수

꽤 괜찮은 해피엔딩

코로나가 엔데믹으로 전환됐지만, 여전히 고통과 불안의 바이러스로 신음하고 있다. 암담한 세상살이에 새 희망을 만나고 싶다. 2023년 봄, 괴로운 소식만 나오던 뉴스에 감동 실화가 소개됐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흔적이 가득한 딸의 첫 출근 소식이다. 바로 모교 교수로 부임한 이지선 교수. SBS <힐링캠프>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뒤로 10년 만에 뉴스에서 만난 그녀는 더욱 생기 있고 아름다웠다.      


2000년 7월 30일, 꿈 많은 스물셋의 이화여대 4학년 이지선은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오빠와 함께 차로 귀가하다가 음주운전 차의 추돌사고를 겪는다. 끔찍한 차량 화재의 피해로 전신 55%의 3도 화상을 입은 그녀는 길고 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와 모교의 사회복지학 교수가 되었다.

     

스물셋에 겪은 사고로 숱한 고비와 셀 수도 없는 피부 재생 수술을 견디고, 꼭 23년 만에 등굣길을 출근길로 걸었다.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던 소원이 모교 교수였다는 이지선. 그 해맑은 모습이 여러 매체에 다시 소개됐다. 욥과 비견되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쾌하게 살아온 이 교수를 만났다.   

       


21년 전 주바라기 홈페이지의 인연


이 교수는 방학마다 수술받으면서 보스턴대, 컬럼비아대, UCLA에서 재활상담학과 사회복지학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2017년 한동대에 부임했다. 박사 논문을 쓰며 인턴 생활을 했지만, 대학 강단이 이지선의 인생 첫 직장이다. 교수 7년 차가 된 올해 모교인 이화여대로 금의환향했다.

    

나와의 인연은 2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2년 월드컵 4강 축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할 때 나는 세상의 환희와 상관없는 청년이었다. 병원에서 가망 없이 퇴원한 의식 없는 어머니를 집에서 6년째 간호하고 있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하루하루를 온종일 중환자 병간호에 집중하며 미래를 계획할 수 없는 막막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 약 처방전을 써주던 의사 선생님에게 이지선 자매의 홈페이지를 소개받았다. 당시 일본에서 화상 치료를 받던 지선 자매는 홈페이지 일기로 아주 특별한 인내의 시간을 투명하게 공유했다. 사고 후 일상을 써간 글들은 무척 솔직했고, 유머러스했고, 사랑스러웠다. 점점 많은 방문객이 화상으로 달라진 모습의 상처 입은 치유자 이지선의 고백에서 희망을 찾았고, 무너진 자기 삶을 회복했다.

     

도쿄에서 수술 또 수술을 견디며 잿더미처럼 비치는 치료 시기를 유쾌한 천국의 그림자로 살아가는 지선 자매에게서 나는 삶의 온기를 얻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에서 언젠가 끝을 만나리라는 터널로 관점을 바꾼 기적을 접한 것이다. 나는 수많은 사람의 발자국이 있는 주바라기 홈페이지의 파수꾼이 되어 이지선 자매의 변화와 성장을 가까이서 보며 감격했다.     

 



KBS <인간극장>의 주인공, 베스트셀러 《지선아 사랑해》 저자, 여러 대중을 만나 믿음과 희망을 전하는 강연가, 온누리교회의 장학금으로 시작한 10년의 미국 유학, 그리고 한동대를 거쳐 이화여대 교수가 된 지금의 그녀는 한 번도 내일을 걱정하거나 심각한 수렁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았다. 다음 스텝의 미래를 계획하지 않았고 오직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이지선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녀의 현실과 미래를 계획하고 책임져 주셨다. 대한민국 힐링의 아이콘으로 알려진 뒤, 다음 세대가 이지선의 존재를 모를 즈음, tvN <유퀴즈온더블록> 출연으로 MZ세대에게도 유명 인사가 되었다. 모교 교수로 설레며 적응 중일 때 강의가 없는 날을 골라 그녀의 집 부근 공원에서 신록의 공기를 맞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꽤 괜찮은 해피엔딩의 진행 중

새 책을 약속한 지 10년 만에 《꽤 괜찮은 해피엔딩》이라는 에세이집을 선보였다. 사회복지학을 공부한 뒤 그녀의 글은 더 깊어졌고, 고통에 대한 해석은 소녀에서 학자의 모습으로 성장했다. 이 교수는 첫 책에서 길거리의 사람들이 오지랖 넓게 쳐다보는 자신을 연예인으로 여긴다고 썼다. 이 예쁜 자존감의 지혜는 실제로 연예인처럼 유명해진 현실로 이끌었다. 미디어는 미국 유학 생활까지 취재해 갔고, 유튜브의 여러 채널에 수많은 강연이 올려져 있다. 모교 교수로 처음 출근한 날은 얼마나 많은 매체의 취재 요청이 있었던가. 혹시 불편하지는 않은지 걱정이 되었다.     


“유명해지기를 바란 적 없지만 힘들지는 않았어요. 글을 썼던 이유도, TV에 나간 것도 제가 사는 게 편해질 거란 기대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나를 오해하는 게 싫었고, 필요 이상으로 걱정하는 것도 싫어서 글을 썼고, 이해를 도우려고 사진을 올렸고요. 나를 똑같은 사람으로 봐주기를 바랐으니까 솔직히 방송 후 사는 게 훨씬 편해졌어요.”   

  

각자의 주관대로 판단하기를 선호하는 우리 사회에서 이지선은 갑작스러운 사고의 주인공이 됐지만, 이를 통해 알게 된 고귀한 비밀을 당당히 전하며 살아간다. 그녀의 첫 에세이의 서두에 <나 이러고 어떻게 살아?>라는 글이 있다. 처음 고개를 들고 다리의 심각한 상처를 봤을 때 죽는 게 낫다는 절망감이 들었고, 원래의 얼굴로 돌아갈 수 있으리란 희망이 무너졌을 때 건물 옥상에 올라가는 것과 기도의 단상으로 가는 것 중 선택해야 했다.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목도했다. 하루 30분 세 번의 면회 시간에 만나는 엄마는 미라처럼 붕대를 감은 지선의 얼굴에 살짝 보이는 눈, 감지도 못하는 그 눈을 보며, “별거 아니야. 너 괜찮아질 수 있어. 걱정 안 해도 돼”라며 큰일이 아닌 것처럼 말해 주셨다.      


하지만 그 강인한 엄마는 중환자실 면회를 마칠 때마다 서 있을 기운도 없이 쓰러지려는 몸을 겨우 추슬렀다. 딸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안심시키던 모성,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예쁜 딸이 얼굴과 전신의 피부를 잃고 사투 중일 때 엄마의 마음을 단단하게 해주신 분이 하나님이다. 딸 앞에서는 한 번도 울지 않았다. 마른 뼈를 살리는 에스겔의 하나님을 언급하며 딸이 잘 먹고 살아나도록 붕대 사이의 작은 입에 밥을 밀어 넣었다. 지선은 엄마의 씩씩한 간호를 받으며 생존확률 희박한 기간을 뚫고 이겨냈다.      


담당 의사는 세상에 나와 사람답게 살 희망을 버리라고 했지만, 그 잔혹한 예견은 진리가 아니었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지선에게 진리의 말씀은 세상에서 사랑받으며 열심히 살아가도록 이끈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꽤 괜찮은 해피엔딩일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해피엔딩이 진행 중이다. 아픔에는 마음 쓰지 않고, 이미 받은 복만을 헤아리며 트라우마를 지워냈다. 온 가족이 지선의 인내와 회복을 감사해하며 매일 감사 기도를 드린다. 목에서 올라오지 않는 억지 감사가 아니라 작은 변화에도 크게 감사하며.          





사고와 헤어진 사람


얼마나 많은 강연과 방송에서 그날을 이야기했을까. 빈번하게 전해야만 하는 입장이 힘들지는 않을까? 이 교수를 인터뷰하면서 나는 사고 그날을 끄집어내는 게 싫지만, 독자들을 위해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교수는 가장 먼저 나누는 말이 “사고를 당했다가 아니고 만났지만 헤어졌어요”다. 이미 오래전부터 강단에서 해온 말인데, 새 책을 출간 후 크게 주목받은 말이 되었다.     

 

“'사고를 당했다'는 피해자 입장에 자신을 계속 두는 말이에요. 피해를 입은 건 사실이지만 마냥 피해자로 살지 않았어요.”      


만남과 헤어짐은 삶에서 누구나 겪는 일이고, 이미 지나갔고 지금은 아픔에서 자유하다는 말이다. 끔찍한 고통과 상처는 트라우마를 남겨도, 이 교수는 사고를 만났다고 표현한 그 순간부터 헤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는 과거의 나쁜 사건이 오늘의 이지선을 괴롭히지 않는다. 그 사고가 자신을 무너트리는 학대자로 기능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 힘은 무엇일까? 더구나 OECD 행복 지수 최저 국가인 비교 사회, 상대적 박탈감의 한국 사회에서 말이다.     


“숟가락에 비친 낯선 제 얼굴을 보고 엄마에게 기도하러 가자고 했어요. 기도처에서 눈물 콧물 범벅으로 나 이제 어떻게 하실 거냐고 따져 물었죠. 역시 아무 말씀도 없으시더라고요. 그러다 하나님이 넌 나의 사랑하는 딸이라는 마음을 주셨어요.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하니 지금 제 모습과 인사 나눌 수 있었죠.”     


거울에 비친 달라진 얼굴을 마주하며 “안녕? 이지선!” 인사하면서 주님의 뜨거운 사랑으로 홀라당 탄 여자라는 유머마저 구사하는 여유까지 생겼다. 그 얼굴은 화상의 흔적이 아니라 주님이 사랑하셔서 살아난 ‘꽤 괜찮은 정 가는 얼굴’로 보였다.      


이지선은 자신을 사랑하는 가족과 사람들의 눈빛과 말만을 기억한다. 떠올려 봐야 괴로운 말, 화나는 생각과 오해, 비인간적인 판단은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는 긍정의 마음, 담담한 생각의 근육을 덤으로 얻었다.          



엄마의 사랑, 그 위대한 돌봄


“2003년에 방영된 인간극장을 다시 봤어요. 그때는 내가 괜찮아진 몸으로 일상 생활한다고 여겼는데 지금 보니 많이 힘들고 고단한 상태였어요. 그런데 우리 엄마가 진짜 무서운 사람이더라고요. 피곤한 딸에게 계속 공부해라, 일찍 일어나라, 모자 써라, 잔소리를 엄청 하시더만요. 보통의 엄마라면 이런 딸에게 그렇게 심한 잔소리를 하지는 않을 텐데, 엄마는 안 그랬어요. 그런 엄마 덕분에 지금 제가 이렇게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 같아요.      


그때 엄마가 저를 계속 예배에 데려갔어요. 피곤하고 체력이 약했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쪼그라든 피부가 척추를 잡아당겨 힘들었는데 엄마는 자주 예배에 데려가셨어요. 그러면서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대화하는 습관이 깃들었어요. 책에 썼지만, 하나님께 나를 데려가 달라고 고통을 토로하면서 하나님을 만났어요.”      


이 교수는 엄마도 하나님도 자신을 극성스럽게 대한 것은 아니라고 고백한다.      

“인간극장에서 엄마가 하신 말 중에 ‘큰일은 작게, 작은 일은 크게’가 있어요. 제가 장애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 엄마의 그 얘기를 꼭 해요. 작은 변화와 성장에는 크게 기뻐하고, 큰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지나왔죠. 당시 잃어버린 게 너무 컸어도 그럴 수 있다고 가벼이 넘긴 것이 큰일을 이기는 힘이 됐어요.”   

   

나는 이 교수와 여러 번 만나면서 익숙해졌지만, 처음 만난 사람은 엄지만 남기고 손가락을 여덟 마디를 절단한 이 교수의 손만 봐도 가슴이 찡하다. 이 교수는 손을 많이 사용하며 대화하는 습관이 있다. 엄지만으로 타이핑하고 손 글씨를 예쁘게 쓰는 것으로도 감사해한다.


한신교회 어머니 기도회에서 간증한 심정 장로님의 말씀에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엄마인 제 눈을 보며 살아갈 희망을 얻는 딸 지선이를 위해 저는 못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강한 얼굴로 대할 수 있었어요. 제가 주관적인 엄마의 눈만 가졌다면 내 딸 이렇게 만든 가해자를 찾아가 멱살을 잡고 살려내라고 소리 질렀을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객관적인 엄마의 마음을 주셔서 가해자는 떠올리지도 않았고 사과조차 없는 가해자를 원망하지도 않았어요. 지금도 친구들의 예쁜 딸을 봐도 부럽지 않고, 지선이도 예쁜 친구들에 주눅 들지 않고 즐겁게 웃고 수다 떨며 만나요.”     


이 교수는 절망적인 상황에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말한 가치만 기억하고, 살아 있음으로 누리는 소소한 것에 크게 감사한다. 그 지혜와 힘의 원천에는 예배의 자리로 데려가며 하나님께 털어놓게 한 엄마의 돌봄과 사랑하는 가족과 교회 공동체의 기도가 있다.  

        


끝나지 않는 수술, 익숙해질 수 있을까


마흔 번 이후로는 세지 않았다는 수술은 또 얼마나 힘들까. 이식 가능한 피부도 줄고, 이식한 피부의 기능도 80%, 50% 점차 줄어간다. 수술은 틈날 때마다 받아야 하고 마취하고 깨어나는 순간의 그 고통과 불쾌함을 계속 마주해야 한다.      


“수술하면 지금보다 나아진다는 희망이 있어요. 이가 아프면 치과 가듯이 익숙해진 수술이어서 실밥도 제가 풀어요. 병원 안 가요. 간호사님, 제가 할 수 있어요. 이러고 안 가(^^).”


이 교수는 아픈 일을 재밌게 얘기하는 센스가 있다. 이런 말을 편안하게 웃으며 할 때의 그 청량함은 신록의 푸른 나뭇잎보다 신선한 생명력으로 귓가에 스민다.     


이 교수에겐 사고 후유증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그 고난이 자신의 몸에 꽃잎을 새기고 소멸되지 않는 향기를 심었다. 현대 의학으로 확 좋아진 얼굴은 아니어도 반복되는 수술로 조금씩 나아진 얼굴은 내가 처음 대면한 2002년보다 훨씬 예쁘게 나아졌다. 심지어 엄마가 “너 이제는 간증 못 해. 너무 예뻐졌어”라고 하실 만큼. 유머는 모전여전이다.      


세상에는 사고를 당한 사람은 많아도 사고와 잘 헤어진 사람은 드물다. 이 교수에게는 우울과 트라우마가 느껴지지 않는다. 사고와 헤어진 사람의 멋짐, 요즘 MZ세대 말로 “폼 미쳤다”는 찬사는 이 교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사람의 내면이 외면을 만든다는 말은 실화다. 어느덧 40대가 된 이 교수의 얼굴은 세상을 잘 살아온 아름다운 얼굴로 완성돼 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화려한 실과를 쫓으며 불행으로 치닫는 세상에서 이 교수의 존재는 우리가 바라봐야 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게 빛나는지 그 행복의 실존을 밝혀준다.



졸업 동기 중 가장 힘든 일을 겪고도 큰 성취를 이룬 인생


비교 행복에 익숙한 현대인은 이 교수 이야기를 처음 들으면 큰 감동에 젖다가도 금세 자신보다 나은 대상과 비교하며 상대적 박탈감에 빠진다. 불행한 사람에게서 안위를 찾고, 행복한 사람에게서 지옥을 느끼는 사람들은 이 교수를 향해서도 엉뚱한 오해를 한다. 성실한 공무원인 아빠를 재력가라고 하거나, 스물셋까지 예쁜 얼굴로 살았으니 좋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판단에, 화려한 유학 생활을 한다는 등. 주목받는 인생의 피곤함으로 수용하기에는 오해라는 감정은 다루기가 쉽지 않다.     


“뭐, 아닌데 어쩌겠어요. 그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시는구나, 해야죠. 그래서 이번에 <유퀴즈온더블록>에 제가 교회의 도움으로 유학 갈 수 있었다는 얘기가 나가서 우리 가족은 고마웠어요. 소천하신 하용조 목사님 사진까지 나왔으니까요. 일본에서 치료받은 것도 부유해서라는 오해가 있었지만, 실은 목과 척추 치료를 잘 받을 수 있는 병원을 찾아 유학생 비자로 갔고, 의료비도 저렴했어요. 미국 유학도 교회 장학금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생각도 못했을 거예요. 석사 과정까지는 그 장학금으로, 박사 과정부터는 교내 장학금으로, 생활비는 독자 장학금(책 인세)으로 충당했죠.”     


이 교수는 한 번도 다음 일을 계획하거나 걱정해 본 적이 없다. 주변의 관심과 배려로 다음 스텝을 결정했고, 10년의 박사 공부를 마쳤다. 공부하는 머리가 뛰어났을까? 내가 지켜본 이 교수는 천성이 느긋하고, 성취를 위해 자신을 몰아치는 성격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의 교육열이 부러워하는 학교들을 척척 잘 다녔다.

     

“사실 절실하게 노력했어요. 못 알아듣는 영어 강의와 토론에 쩔쩔맸고, 한국에서는 바보가 아닌데, 하며 몰래 화장실에서 울기도 많이 했어요. 다행히 제 특기가 말하기와 글쓰기잖아요. 친구들과 재밌게 말하며 수다 떠는 것을 즐겼거든요. 그래서 외국어를 익히는 데 언어적 센스가 있었던 것 같아요. 미리부터 유학을 준비하고 토익 점수를 확보하려고 애쓴 적 없었는데도 유학을 마쳤어요. 홀로서기로 유학길에 올랐을 때 엄마는 제가 이대 교수가 되면 좋겠다는 소원이 있었다고 최근에 말해 주어 알았어요.”   

  

유학생 이지선은 재활상담학 석사와 사회복지학을 석박사를 공부하면서 인턴, 수업, 논문으로 꽉 짜인 생활을 잘 버텨냈다. 박사를 마친 동기 졸업생들은 모두 포스닥과정에 연구 진로를 결정했지만, 이 교수는 아무 계획이 없었다. 엄마에게 “나이 마흔에 박사 따고 나 이제 백수 되는겨?" 했다고 한다. 미래는 자신을 살리신 하나님이 알아서 인도하시겠지, 하는 믿음으로 느긋했다. 그렇게 UCLA 박사 졸업식에서 유일하게 진로가 결정되지 않은 이지선은 귀국과 동시에 한동대 조교수로 부임했다.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 박사를 취득해도 교수 자리가 쉽게 나지 않는 현실이지만, 하나님은 이지선 인생에 앞장서서 세밀하게 인도하셨다. 영어로 강의해야 하는 힘든 초보 교수의 분투 시절을 보내고 7년 차 연구년에 들어서면서 모교 교수로 부임했다. 모교 임용 합격 소식에 눈물이 쏟아질 만큼 감사했다고 한다. 하나님은 열심히 간구하고 절실하게 노력하는 것을 보시지만, 언약을 지키며 인생을 책임지고 선물 주시는 분임을 다시금 경험했다.          



인생 3막, 이지선 교수의 소망


이 교수는 사회 약자의 편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이 스피커가 되어 선한 영향력을 순환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장애인이기 전에 사람이며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기본적인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가까이서 듣고 싶어 한 이 교수는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소외된 소수자들,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분들에게 필요한 도움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들의 목소리를 담는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아동복지실천회 세움을 통해 수용자 자녀들을 한 달에 한 번씩 만나고 있어요. 같이 영화나 공연을 보고 밥도 먹고 봉사활동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눠요.”     


 교수는 연구자로서 찾아가야  대상의 분들이 다가오셔서 도움의 소리를 들려주시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교수는 장애인 재활 자립을 돕고 병원을 세우는 푸르메재단 홍보대사다. 땀구멍이 막힌 화상 피부로 마라톤과 같은 격한 운동은 힘들 뿐만 아니라 8킬로 정도 걸어본 것이 운동의 전부인데  교수는 국내 최초 어린이 재활병원 설립을 위해 2009 뉴욕시민마라톤대회에 출전했다.      


푸르메재단 홍보 사진  컷만 찍으면 충분했기에 중간에 적당히 빠져 지하철을 타려고 는데, 25킬로미터 지점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피켓을 만들어 35킬로미터 지점에서 기다리며 응원해  교민  사람의 응원 덕분에 움직이지 않던 다리가 쭉쭉 뻗어져 완주해 냈다. 그때 7시간의 기록을 끊고는 심지어 4개월  서울에서 열린 마라톤에도 참가해 6시간대에 완주했다. 재활병원 건립비 모금을 위한, 괴로운 한계의 도전을 연거푸  이유는  사람의 따뜻한 응원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경험했기 때문이다. 약자에게 힘이 되는 응원 목소리가 되기를 원한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가능한 이유


헨리 나우웬 같은 영적인 거장도 영혼의 사막에서 막막한 시간을 겪었다. 이 교수는 늘 밝고 경쾌해 보인다. 그 힘의 비결은 무엇일까?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를 넘기고, 세상에 나가 살 생각 말라는 의료진의 말을 역전시켰지만,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자존감을 지키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 교수에게 사고 전, 사고 후, 현재의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물어보았다.     


사고 초기에 하나님이 무서운 훈련 교관처럼 느껴진  있어요. 끝나는가 싶은데  진흙탕에서 포복해야 하고,  바로 위에는 철조망 있는  같고, 훈련 마친  알았는데  뛰어내려야 하고…. 그런데 그게 오해였다는  알게 됐어요. 제가 고통에서 자유로워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 앞에 섰을 때부터예요.”    

 

하나님은 이지선을 고통 속에만 두지 않고 이겨낼 힘과 도움의 손길을 그침 없이 주셨다. 결정적으로 이지선의 신앙은 약속의 하나님,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는 데서 기인한다. 그 때문에 환난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 사랑의 하나님이 이지선을 환대하셨기 때문에 이지선 자신도 사고로 달라진 인생을 환대하며 살아간다. 키 작은 삭개오와 우물가의 여인이 만난 주님의 환대를 늘 누리며 사는 것이다.  

   

“꽤 괜찮은 해피엔딩이 있잖아요? 상황이 나아지지도 않는 고민, 득 될 것 하나 없는 걱정은 하지 말아요.”


_글 황교진 / 신앙계 2023년 6월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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