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나가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후지게 살지는 말어
"전북 부안의 변산반도는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수많은 절경이 이어지는데 이 일대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변산은 바다를 끼고도는 외변산과 남서부 산악지의 내변산으로 구분한다."
쇼미더머니 6년 개근의 래퍼 학수(박정민)가 지긋지긋해하며 떠난 고향 변산은 이런 곳이다. 바다와 산이 가까운 곳, 절경의 고향이지만 그는 심뻑이라는 이름으로 랩을 하며 사투리 억양을 지적하는 심사위원에게 "내 고향은 서울"이라며 시크하게 말한다. 시즌 6에서 꼭 래퍼로 성공하고픈 그에게 주어진 랩 배틀 키워드가 "어머니"이다. 하필이면 왜 아버지 때문에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어머니인가.
건달인 아버지께 학대받다가 암에 걸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장례식장에 오지도 않은 사고뭉치 범법자 아버지, 변산을 떠나서 살라는 말을 남기고 그렇게 일찍 가신 어머니를 주제로 랩을 해야 하다니. 학수는 가삿말이 머리에서 감돌다가 가슴을 통과하지 못하고 무대에 그대로 서 있고 만다. 뭔가 되는 듯하다가 걸려 넘어지고 답답한 삶을 쳇바퀴 도는 삶. 이 빡센 청춘의 유일한 탈출구이면서 성공하지는 못한 랩이 영화를 역동적이고 화려하게 때로는 심금을 울리는 효과로 들려온다.
이준익 감독이 마이너리티를 보는 시선의 본질은 항상 인간다움에 대한 따뜻함이다. 이번 작품 곳곳에 배어 있는 유머는 <라디오 스타>와 <박열>을 거치며 더욱 진화했다. 답답하고 꼬여 있지만 인간다움의 추구가 만화 같은 설정에서도 변산이라는 지역이 제3의 배우인 양 커버해 준다.
누구에게나 흑역사가 있지만, 하필 고향에서 보낸 성장기의 흑역사가 한두 가지가 아닐 때 죽어서도 돌아가기 싫을 것이다. 그 고통의 지점을 어떻게 정면으로 마주하고 재발견할 수 있을까?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으면 영원히 아픔과 편견으로 살아가고 말 것이다. 학수에게 단 한 번이라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한 적 있냐고 다그치는 선미(김고은)의 날 선 소리는 이 시대 청춘들을 향한 소리이다. 값나가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후지게 살지 말라는 그녀의 조언은 청춘이 청춘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에 가슴을 파고든다. 그동안 우리 청춘들은 얼마나 귀가 따갑도록 시달렸는가. 고성장시대를 산 꼰대들의 노오오력해 보라는 훈계에...
학수의 천재성을 알아본 교생은 그의 습작노트를 훔쳐서 카피한 시로 상을 받고, 자신이 좋아한 미경은 그 도둑놈 교생과 썸 타는 사이로 등장한다. 게다가 학수의 빵 셔틀이던 찌질이 용대는 건달이 되어 금, 은, 동 체육인 부하들을 데리고 나타나 모욕을 준다. 고향 파출소는 허술한 범인 몽타주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학수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변산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발을 묶는다. 가족의 정은커녕 증오만 가득한 아버지는 곧 돌아가실 줄 알았는데 말짱해 보이고 혈기는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존재감 조금도 느끼지 못한 선미는 면사무소 직원이라는데 학수가 사모한 등단 작가가 되어 있고 1억 원 상금의 문학상까지 받는다. 이 눔의 고향, 다시 봐도 지긋지긋하다. 그런데 떠날 수도 없다. 얼른 서울로 돌아가 쪽방에서 지내고 발레파킹과 편의점 알바로 푼돈 벌며 살더라도 랩을 연마해 기회를 잡아보는 게 낫겠다.
<변산>은 답이 없는 청춘들에게 유쾌함을 주려는 영화는 아니다. 최근 한국 영화 중에 가장 힘 빼고 편안하게 웃으며 즐길 수 있는 영화지만, 숨어 있는 메시지는 가볍지 않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존경과 이해란 단어를 접목하는 아들이 있다면, 나는 소수자라고 생각한다. 남자는 성장하면서 아버지에게 대들고 극복해 내야 하는 심리적 콤플렉스를 지닌다.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였던 적이 있을 만큼, 온갖 풍상을 겪으며 살아온 아버지일수록 아들의 삶을 존중하기보다 고통을 준다. 아버지는 아들을 향한 집착이 폭력이 될 수 있는 면을 생각하지 못한다. 학수의 아버지는 그 혈기의 종착지에 와 있다. 죽기 전에 아들과 화해하고 싶은 마지막 양심을 지니고 있어도, 학수에게는 아버지가 집을 떠나 있던 시기가 가장 행복했을 만큼 끔찍한 대상일 뿐이다. 어머니 장례식장에서마저 아버지 부재로 모멸감을 견뎌야 했던 그에게 가장 듣기 싫은 소리가 "아버지와 똑같은 놈"일 것이다. 우연히 서울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들은 그 말에 자신이 해당되지 않음을 입증하고 싶어 돌아가시기 전에 얼굴이라도 봐주겠다며 내려간 고향 변산.
병실의 아버지 침상 맞은편에는 동창생 선미가 휴직계를 내고 하반신을 못 쓰는 아버지를 간호하고 있다. 학수는 선미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할 만큼 관심이 없지만, 선미에게 학수는 간절한 짝사랑의 그리움이다. 학수를 향한 연모 때문에 <노을 마니아>라는 책을 낸 소설가로 살고 있다. 반면 학수의 짝사랑은 피아노 학원을 하는 미경이다. 선미와 미경 그리고 찌질이에서 지역 건달이 되어 나타난 용대가 얽히면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청춘 극장이 된다. 김광석의 통기타 노래가 나오고 EDM과 랩이 어우러지며 추억과 현실이 충돌한다. 이 지점에서 수많은 유머 코드가 발생해 재미를 준다. 전라도 특유의 걸쭉한 욕 사투리로 몇 번을 웃었는지 모른다. 이준익 감독 특유의 발상과 해학이 캐릭터들이 뿜어내는 순발력의 대사로 폭소를 일으키는 가운데 학수가 지닌 아버지 콤플렉스가 해체된다. "아버지와 똑같은 놈"이란 말 때문에 내려왔다가 그 말을 선미에게서 또 듣는다. 자신은 아버지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도 정면을 바라보지 못하는 후진 인생이란 말만 되돌아온다.
심리학에서 남자는 아버지를 들이받고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고 한다. 학수는 사방이 꽉 막혀 있고 비어 있는 변산에서 사방을 꽉 채우는 노을 풍경을 응시하는 것이 유일한 위로였고, 선미는 그런 학수를 좋아하면서 노을 마니아가 되었다. 두 사람의 인연과 관심이 학수의 극심한 아버지 콤플렉스를 해결하는 단초가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학수에게 남겨 준 서울행 기름값, 그 기름값은 학수에게 고통뿐이던 아버지와 화해한 선물이다. 아버지와의 화해로 학수에게 변산은 흑역사의 고통에서 노을이 빛나는 고향이 된다. 쇼미더머니에 6년이나 개근하며 도전한 그에게 유일한 해방구가 랩이었지만, 이제 고향을 얻으며 청춘의 질곡에서 해방되고 있다.
돌아갈 곳, 품어줄 곳, 노을이 있는 친정.
출구 없이 답답한 시간을 보내는 청춘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프라와 네트워크가 아니라 돌아갈 곳이 있는 심리적 고향이 아닐까. <리틀 포레스트>가 서울에서 번아웃되어 내려온 고향에서 사계절 음식을 해먹으며 힐링을 얻고 다시 힘을 내는 '그림 청춘'이라면 <변산>은 고향에서의 흑역사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지긋지긋함과 초라함에서 화해와 자존감을 얻는 '현실 청춘'이다.
<변산>을 보는 나는 아버지와 화해하고 뛰어넘은 아들로 살고 있을까. 한참 진지한 고민에 들어가 있을 때 뮤지컬의 커튼콜 같은 엔딩 장면이 그만 진지하고 재밌게 살라고 등을 떠밀어 준다.
8킬로그램이나 살을 찌워 선미를 소화한 김고은에게 박수를 보낸다. <은교>에서 처음 만난 고운 씨앗이 <변산>에서 활짝 꽃을 피웠다는 생각이 든다. 학수 역의 박정민은 전작의 피아노 연주에 이어 이번엔 랩을 소화하며 전라도 특유의 거칠거칠함을 따박따박 연기해 냈다. <그것만이 내 세상>의 장애인 오진태를 연기했을 때 <길버트 그레이프>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오아시스>의 문소리처럼 대성할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다. 이준익 감독이 만드는 마이너들의 세상이 계속 나와주길 바란다. <변산>이 천만 관객을 향해 가고, 영화 속 그 노을 언덕에 가보려는 사람들의 풍경이 그려질 만큼, 좋은 한국 영화이다.
*브런치무비패스로 감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