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잃을 수 없는 부성애, 숨 막히는 인터넷 수사
완전히 새로운 시도
<서치>의 예고편을 봤을 때는 단순히 아빠가 실종된 딸의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스릴러물로 생각했다. 많은 영화가 네티즌 수사대 같은 요소를 도입했기에 특별히 새로운 점을 기대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시사회(브런치무비패스, 대한극장)에서 경험한 <서치>의 새로움은 완전한 형태여서 낯설고 두통이 일었다. 관객의 몰입도는 최고였다. 한인 가정이라는 요소도 한몫했다. 스크린 앞 네 번째 줄에서 본 화면은 그야말로 초대형 컴퓨터 모니터였다. 그러니 하루 종일 모니터만 바라보는 업무에 시달려 뭔가 신선한 휴식을 기대하고 극장에 온 관객은 머리가 아플 수 있다. 맨 뒷좌석을 선택하길 바란다. 처음부터 끝까지 SNS, 영상통화, 메신저, CCTV, 1인 방송으로 이어지니 그 어느 영화보다 스크린과의 충분한 거리가 필요하다.
사라진 딸의 흔적을 검색하다
한국계 미국인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아빠 역의 존 조는 <스타트랙>으로 익숙하고, 삼촌 역의 조셉 리는 KBS 드라마 <우리가 만난 기적>에 출연했다. 엄마 역의 사라 손, 사라진 딸 마고 역의 미셸 라 모두 한인으로 주연을 배열한 영화여서 새로웠지만, 그보다 윈도우와 애플 디바이스 화면으로 스크린을 채운 것이 끝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신선함에 승부수를 던진 영화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몹시 피곤했다. 상대 배우보다 모니터를 보며 연기한 존 조는 관객보다 훨씬 피곤했을 수도 있다. 게다가 아내를 암으로 잃고 고등학교에 진학한 딸의 실종이라니... 마고의 탄생부터 행복한 가족의 모습으로 이어지다가 암을 진단받은 아내의 첫 발병을 이겨낸다. 아내는 딸 마고의 제1 양육자로서 다정하고 따뜻하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가르친다. 영화의 초반은 캠코더로 찍은 가족 영상의 기록으로 엄마의 암 말기 투병과 사망까지 이어지다가 제1 양육자이며 혼자가 된 아빠와 딸의 메신저 대화로 시작한다. 사춘기 딸과 아빠 사이에 엄마라는 쿠션이 없다. 서로의 상실감에 대해 조심스럽고 아빠 데이빗은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도 지쳐 보인다. 그런데 목요일 밤, 친구 집에서 밤샘 스터디를 하겠다는 일방적인 영상통화를 남기고 딸은 사라진다.
아내를 잃은 아픔이 뚜렷한 시기에 딸의 실종이라니... 데이빗의 모든 신경은 딸의 흔적을 찾는 데 집중한다. 딸의 SNS, 메일, 메신저 대화, 1인 방송의 기록을 모두 샅샅이 뒤진다. 개인정보 열람의 문제는 사소하다. 딸이 왜 사라졌는지 증거를 찾아야 한다. 데이빗이 알고 있는 딸의 인터넷 속 모습은 너무나 생경하다. 사춘기 딸의 변화라고만 하기에는 그 간극이 너무 벌어져 있다. 단지 딸의 성장기에 일어나는 변화라고 하기에는 그 긴장감이 평범하지 않다. 도대체 가족이 무엇인가? 어디서부터 이런 큰 문제가 생겼을까? 딸은 도대체 어디에 간 것이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 새벽의 부재중 전화 3통은 분명히 SOS였을 것만 같아, 담당 경찰 로즈메리 빅은 가출로 해석하지만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SNS의 잔인성은 극악하기가
데이빗에 대한 비난이 쏟아진다. 아버지가 엽기적인 범죄를 저지른 범인일 것이라는 억측 앞에서 데이빗은 분노할 여유조차 없다. 악플과 모욕과 인격 테러들 속에서 딸은 누구를 만났고 지금 어떤 상태인지에만 서치에 서치를 골몰한다. 집요할 수밖에 없다. 수영을 못해도 물에 빠진 딸을 봤다면 뛰어들어 구하려는 게 부모의 심정이다. 가장 아픈 자를 위로하기는커녕 함부로 말하고 엄청난 모욕을 주는 것을 우린 세월호를 보며 뼈 아프게 경험했다. 데이빗을 향한 인터넷 속 말들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인터넷에는 왜이리 악마들이 득실거리는가. 아픈 사람을 더 헤집어 놓는다. 심지어 딸과 지금 옆에서 성관계를 맺고 있다는 글까지 등장한다. 데이빗은 참을 수 없어 그놈을 찾아가 직접 타격한다. 이 일로 담당 형사는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엄포한다. 빅과 데이빗은 야간에 페이스타임으로 대화를 나누며 사건의 전개를 관객에게 보여주는데 이런 페이스타임의 답답함은 데이빗이 가진 수사에 대한 답답함을 그대로 전달한다. 그런다고 데이빗이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 없다. 가만히 있는 것은 곧 딸을 포기하는 것이고 아빠로서 직무유기다. 아내가 없는 세상에서 딸마저 잃어버리면 미칠 것만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딸이 살아 있으리란 희망도 작아진다.
동시에 초동수사에서 데이빗을 외면하고 마고와 별 관계 아니라는 무심한 친구들이 자신의 SNS에서 마고와의 절친임을 말하고 살아서 돌아오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착한 글들을 올리며 주목받으려 한다. 관종들이 많은 것도 어디서나 똑같다. 진정성은 없고 대중의 주목을 받기 위해서는 거짓말도 스스럼없이 하는 SNS 유저들. 한국이나 미국이나 그 위선의 정도는 별 차이가 없다.
딸은 살해당한 것일까
범인을 찾았다는 빅의 연락이 올 때 그는 동생과 다투고 있었다. 동생이 범인일 것 같은 마고의 메신저 대화를 발견하고 몰래카메라를 설치해 동생의 자백을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동생은 엄마 잃은 조카를 위로하려고 마리화나를 건넨 잘못을 저지른 것 외에 행방을 알지 못한다고만 한다. 충격적인 것은 실종된 딸이 아빠보다 불량 삼촌과 마음을 터놓고 지내왔다는 사실이다. 아내를 상실한 자신만큼 엄마를 상실한 딸의 아픔을 잘 돌봐주지 못했다는 것을 동생의 저항으로 발견한다. 피아노 학원비를 타면서 피아노 근처에 가기 싫어한 딸이었다는 사실, 엄마를 잃은 우울감이 그토록 깊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딸의 마음을 위로할 에너지가 데이빗에게 없었고 시간이 필요한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자신이 빨리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한 원죄가 딸을 그렇게 불행하게 만들었다니...
데이빗은 바닥에 쓰러져 통곡한다. 결국 딸은 이미 저 세상에 있는 것인지... 세상에 홀로 남겨지다니...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딸에게 진짜 가족으로 아빠는 없었을까.
반전이 그나마 숨통을 열어 준다
반전이 있을 거란 기대를 놓지 못한다. 그대로 종지부를 찍기에는 스토리가 너무 허전하고 중간에 많은 떡밥이 설치돼 있어 무엇인가 결정적인 한 가지를 숨겨 놓았을 것 같은 의구심이 든다. 그렇다고 <서치>가 반전에 대한 강박을 가진 영화는 아니다. 관객을 엉뚱한 방향으로 빨려 들게 하면서 이게 있는지 몰랐지? 하는 허탈함의 반전 영화가 많지만 <서치>는 치밀하게 데이빗의 감정선을 쫓아가다가 새로운 윤곽을 꺼내며 수상한 퍼즐을 자연스럽게 맞추어 낸다. 거기서 많은 현대인의 기만을 들추어 밝힌다. 인터넷 속의 이중인격, 심리적으로 병든 자가 프로필을 위장하여 접근하고, 위로받기 위한 대상을 찾으려다 인터넷 속 가면을 만나고, 그 거짓을 의심하면서도 사실로 받아들이는 가상현실의 위선이 얼마나 진화해 있는지를 전달한다. 결코 노골적이지 않아서 더 섬칫하다.
<서치> 곳곳에 타이핑의 섬세함이 전하는 작은 웃음도 있고, 답답한 절망과 탄식이 배어 있다. 예민한 관객이라면 웃다가 울 수 있다. 그런데 나처럼 예민한 관객은 시종일관 숨 막히는 스릴러를 경험한 탓에 빨리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가고픈 생각이 간절해진다. 하루 종일 모니터를 보고 앉아 있는 일상에 대한 회의와 고단함 때문이랄까. 스마트폰 메신저를 떠나 숲과 공원, 자연에 들어가고 싶고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내 가족은 잘 있을까? 우리 아이들은 마고처럼 철벽을 두르고 감정을 숨기며 1인 방송의 카메라를 켜놓고 자신을 위로해 달라고 하지 않을까? 난 데이빗과 같은 아빠로서 국가와 경찰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야 할 책임감과 의무감에 눌린다. 그 답답함이 영화 속 새로운 전개 장치인 인터넷 프레임에 가두어 숨을 못 쉬게 한다. 새로운 시도에 박수를 보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뿐인 자녀와 아빠의 고통을 최악의 상황으로 건드린 소재 탓만은 아니다. 모니터 앞에서 시달리며 돈을 버는 가장으로서 영화를 보는 시간만큼은 좀 쉬고 싶기 때문이다. 스릴러가 진화하면 그 현실감에 두통이 생길 수 있다. 그만큼 시나리오와 연출력, 존 조의 연기력이 실제적인 작품이다.
무거운 질문이 남는다!
누군가 내 SNS로 들어와 집요하게 나를 추적한다면... 그 집요함에도 괜찮은 진실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를 남다르게 보이려고 얼마나 애를 쓰며 살고 있는가? 인터넷해킹의 폐해를 다룬 영화가 아니지만, 그 질문에 답을 해야 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