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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T에도 이상소견은 보이지 않았고, 수술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났지만, 할아버지의 장마비 증상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가스가 배출되고 소량의 변을 보았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가스의 배출은 장 운동이 돌아오고 있는 신호로 해석하기 때문에 식이를 진행할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되지만, 장을 수술한 환자의 경우라면, 복부 X-ray의 호전 상황을 면밀히 확인해 식이 진행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할아버지의 경우에는 복부의 가스가 아직 정상적인 형태로는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점차 힘들어하고 비위관(콧줄)으로 인한 불편감을 상당히 많이 호소하였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비위관 제거 여부를 결정하고, 식사 진행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했다.
정성스럽게 간병을 하던 보호자들도 시간이 지나고 호전이 없는 상황이 반복되자 지쳐갔다. 생업을 뒤로하고 간병에 매달렸지만, 확연한 진전이 없었고 나날이 날카로워지는 할아버지의 가시 돋친 언행들이 보호자들을 지치게 했다. 그래도 담당의라고 나에게는 비교적 온화한 단어를 논리적으로 나열하여 자신의 고충을 토로하셨지만, 보호자에게는 그러지 못한 모양이었다.
"할아버지. 저랑 약속 하나 하실까요?"
"이선생 무슨 약속? 그런 거 말고 어서 이것 좀 빼줘. 아파 죽겠어"
"알았어요. 그거 빼 드릴 테니까 저랑 약속하시자고요."
"그려 뭘 약속할까? 이거 좀 빨리 빼줘"
"콧줄을 뺀다고 해서 바로 식사를 하실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아시겠죠? 먼저 물부터 조금씩 시작할 겁니다. 소량씩 목을 축일 수 있을 정도만 드셔야 해요."
"알았어 그럴게...... 이제 빼줘"
"하나 더 남았어요. 일단 콧 줄은 뺀다고 해서 장이 좋아진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지금처럼 운동을 계속하셔야 해요."
"알았어 빨리 빼줘. 답답해"
"약속한다고 하시면 지금 빼 드릴게요."
"알았어 알았어 약속할게."
"누워 보세요. 고개를 편하게 하시고요"
"으으윽..."
"이제 다 빠졌어요. 다 됐어요 이제"
할아버지의 코를 통해 위로 들어가 있던 70cm의 기다란 콧줄이 밖으로 형체를 드러냈다.
"아고고 깊이도 들어가 있네. 이제야 살겠다. 살겠어. 고마워 이선생"
"저랑 약속하신 거 잊지 마세요. 운동하셔야 합니다. 물은 소량씩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알았어 고마워"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할아버지를 보며 잠시 기분이 나아졌지만, 금세 장마비가 악화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 비위관을 제거한 뒤에도 할아버지의 상태는 나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물을 조금씩 마시게 되면서 가스 배출도 원활해지고, 장의 가스 패턴도 호전되는 것으로 보였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식사를 미음으로 바꾸게 되었고, 미음을 섭취한 지 3일이 지나서는 죽을 드셔도 될 정도로 호전이 되었다. 혈액검사는 호전되어 정상 수준으로 측정되었고, 발열이나 통증도 없었다.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게 된 것이 분명했다. 이제는 퇴원을 준비할 시기가 되었다. 수술 후 몸속에 거치되어 체액 성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던 배액관들도 제거가 되었고, 상처는 잘 아물어 실밥을 모두 제거했다.
"오늘 기분은 좀 어떠세요?"
식사를 하던 할아버지에게 안부를 물었다.
"응? 이선생 왔어? 밥맛도 좋고, 다 좋아. 나 이제 집에 가도 되는 거야?"
"네. 이제 퇴원하실 준비를 하셔야겠어요"
"그래? 언제쯤 퇴원할까? 가족들이 나 때문에 고생하는 걸 보니까 퇴원을 좀 빨리하고 싶어. 몸도 좋아졌고, 할망구 혼자 있는데 걱정이 돼서 빨리 가야겠다 싶어"
"내일쯤 퇴원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그려. 마침 큰아들이 내일 온다고 하니까 내일 가면 되겠네. 이선생. 수술하면서 검사한 거 결과 나왔어? 어때?"
"내일 보호자분 오시면 같이 설명드리겠습니다. 예상했던 결과가 나왔어요. 퇴원하신다고 다 끝난 게 아니라는 건 알고 계신 거죠?"
"무섭게 또 이러네. 결과가 별로야?"
"아니에요. 예상했던 결과가 나왔어요."
"예상했던 결과면 나쁜 거 아녀?"
"내일 설명드릴게요. 오늘은 일단 식사하시고, 창밖에 한강 경치 좀 실컷 구경하셔요"
"이제 너무 봐서 지겨워. 내일 아들 몇 시에 오라고 할까?"
"오전 회진시간 맞춰서 오실 수 있으시겠어요? 8시 정도가 좋겠는데"
"그려 오라고 하지 뭐, 서울이니까 금방 올 수 있을 거야"
"네, 내일 설명드리겠습니다. 푹 쉬시고요. 병원에서 마지막 밤이니까 꿈도 꾸지 말고 푹 주무세요"
"그려 이선생 내일 봐"
출처: https://mdaslan.tistory.com/97 [의사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