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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보리얀 신경아 Jul 08. 2024

그림책이 전하는 위안  여름비, 싱그러운 자연의 축복

2024년 7월 서울시 북부교육청 [마음 배달 알리미]

서울특별시 북부교육청에서 만드는 소식지 [7월 마음 배달 알리미]

                                                                         

글 신경아 (안산 관산중학교 미술교사)


그림책 속에서 꿈의 방향을 발견하다


  열일곱 소녀 시절, 하굣길 서점에서 집어 든 한 권의 그림책으로 저는 그림책의 세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책은 유리 슐레비츠의 『비 오는 날』이었어요. 창가에서 빗소리를 듣는 소녀의 내레이션을 따라 책장을 넘기니 신기하게도 저의 영혼이 깊은 산 속으로, 굽이치는 강으로, 넓은 바다로 이동하는 것만 같았어요. 종이책일 뿐이었는데 책장을 덮고 나니, 마치 제 몸은 흠뻑 비를 맞은 것 같았답니다.

  

 이 강렬한 경험은 한창 공부해야 하는 고등학생인 저를 서점의 그림책 코너로 계속 이끌었어요. 나도 언젠가 그림책을 그리고 싶다는 꿈을 가슴에 품게 되었지요.

[비오는 날]  유리슐레비츠 시공주니어 (사진출처 알라딘)


  미술대학에 진학하고 대학원을 졸업하며 미술 교사가 되었습니다. 방학이면 원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해 교사가 되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어요.

  가정을 이루고 두 아이를 낳아 육아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그림은 미뤄두고 직장생활을 이어가야만 했지요. 야자 감독을 하는 엄마를 기다리며 어둑한 교무실에서 색종이를 접으며 눈을 비비던 아이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마흔 살이 되어 저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집 근처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퇴근 후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어 각자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죠. 집에 갈 시간이 되면 두 아이는 큰 대자로 누워 잠들어 있었어요. 아이들을 깨워 집으로 돌아오는 길, 겨울나무 사이로 휘영청 뜬 둥근 달을 보며 ‘엄마가 그림 그릴 수 있게 같이 와줘서 고마워.’ 마음을 전했던 날들이 기억납니다.

  그런 시간이 모여 네 번의 개인전을 열 수 있었고 저는 작가로, 교사로, 엄마로 매일 세 가지 옷을 갈아입으며 살고 있습니다.



언어가 아닌 영상을 통한 소통


  제가 근무하는 학교는 ‘국경 없는 마을’이라고 불리는, 안산 원곡동에 위치한 관산중학교입니다. 우리 학교는 전교생의 90%가 다문화 학생이에요. 외국인 노동자의 자녀, 결혼 이민자의 자녀, 난민의 자녀들이 저의 제자랍니다.


  3년 전 우리 학교에 부임했을 때의 충격이 생생합니다. 한국어를 말하는 것이 서툰 아이들이 많아 수업 방식에 정말 고민이 많았어요. 처음에는 아이들을 이해하려면 언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학교의 대표 언어인 러시아어와 중국어를 배웠어요. 그러나 배움의 한계가 있어 그 속도를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죠. 그래서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언어가 필요 없는 동영상을 찍기 시작한 거지요. 모든 수업마다 재료 준비, 재료 사용법, 정리까지 단계별 영상을 찍어 아이들과 소통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굉장한 일이 벌어졌어요.   


  아이들은 말로는 할 수 없었던 가슴속의 깊은 이야기, 내면의 열정과 섬세함을 그림으로 다 드러내기 시작했어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미술이 전 세계의 언어였던 거예요! 예술은 아이들의 언어를 뛰어넘어 말하게 하고, 들을 수 있게 하고,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게 했습니다. 예술로 우리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한 아이의 삶을 찾아가는 따뜻한 존재

- 그림책


  저는 우리 학교에 와서 비로소 공교육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공교육은 낮은 자의 마음으로 찾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에요. 때로는 아무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오지로, 아무도 봐주지 않는 한 아이의 삶으로요. 그리고 그 아이에게 ‘이 세상에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 교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 후, 저의 작업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림책. 글자를 읽을 수 없는 이에게 그림만으로도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그림책을 그리기 시작한 거예요. 최소한의 언어와 이미지로 아이들과 소통해 오던 경험이 작업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 가슴속에 품고 있던 작은 씨앗, 언젠가 그림책을 그려보고 싶다는 그 바람이 우리 학교에서 비로소 싹으로 움터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죠. 3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에 말이에요.


  저의 첫 그림책인 『여름비』는 치유와 축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비가 내려 온 세상을 맑게 씻어내고 모든 생명을 살아나게 합니다. 물기 가득한 싱그러운 책장을 넘기면, 달개비, 수국, 나팔꽃, 아기 오리, 개구리를 따라가며 어느새 생명 가득한 책 속으로 들어가 함께 뛰어놀게 됩니다. 어린이뿐 아니라 모든 연령대에 위안을 주고 싶은 마음을 담아 그렸습니다.

[여름비] 아이보리얀 신경아 논장


  작가로 활동하며 전시회를 열 때, 사람들은 제 그림을 보러 갤러리로 찾아옵니다. 작품은 단 한 점만 존재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선택되면 그분의 소유가 되어 원작자인 저조차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나요. 기쁘고 벅차지만 한 편으론 아쉬운 순간입니다. 반면에 그림책은 누구나 가질 수 있어요. 아이부터 어른까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그야말로 모두를 위한 예술이에요.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그림책의 가장 큰 매력을 말씀드릴게요. 그건 그림책은 사람들에게로 찾아가는 존재라는 거예요. 어쩌면 오지로, 어쩌면 아무도 봐주지 않는 한 아이의 삶으로요.



아이들과 함께 그리는

그림책으로 나누는 사랑


  그림책이 나오자, 학생들이 정말 기뻐하고 축하해 주었어요. 도서관에 제 그림책이 들어와 청구 번호가 붙은 날을 잊을 수가 없네요. 한국어를 모르는 아이들도 책장을 넘겨보며 활짝 웃었어요. 사서 선생님은 도서관 연계 수업을 기획해 주셨습니다.


  『여름비』를 읽고 아이들과 <나의 여름>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려보았어요. 그림 속에는 짧은 글도 한 줄씩 적었지요. 제 그림책이 아이들의 손에서 또 다른 색깔로, 언어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정성을 다해 그림을 그리고 자기 마음을 여러 나라의 언어로 꼭꼭 눌러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그것이 선생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임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수업은 아홉 개 반에서 이루어졌는데 아이들은 그림으로 계속 저에게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그림으로 돌아오는 답장 같았지요. 그럴 때마다 눈물이 쏟아져 아이들 몰래 고개를 돌려 벽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림책을 너무 갖고 싶지만 구입할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마음 따뜻한 지인이 그림책 50권을 기부해 주신 일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그림책에 제 사인을 받아 꼭 끌어안고 기뻐했어요.

[여름비] 아이보리얀 신경아 논장

  저는 그동안 교사와 작가는 전혀 다른 직업이고 별개의 영역이라고 여겨왔어요. 하지만 이제 저에게 이 둘은 다른 것이 아닌,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예술이 가진 치유의 힘이 사람과 세상을 맑게 씻어 줄 수 있음을 알기에, 저는 그리고 가르치는 일에 같은 마음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이 편지를 받으실 즈음이면 여름비가 시원하게 땅을 적시고 있겠죠? 지금 우리 앞의 찬란한 풍경을 그림책에 담아보았어요. 그림책을 펼쳐 보시며 사방을 감싸는 금빛 햇살, 여름의 온갖 초록이 건네는 맑디맑은 씻김과 치유를 느껴보세요. 또한 선생님의 가슴속에도 보듬고 있는 씨앗이 있다면 싹을 틔울 수 있도록 물 주고 사랑하시면 좋겠습니다.  


[여름비] 아이보리얀 신경아 논장



글쓴이 아이보리얀 신경아
예술이 가진 치유의 힘이 사람과 세상을 맑게 씻어 준다고 믿으며 그리고 가르치는 일에 마음을 다합니다.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대학원에서 미술교육을 전공하고, 미술 교사로 일하며 그림을 그립니다. 2023년에 제12회 대한민국 스승상을 수상했습니다. 첫 그림책인 『여름비』는 2025년 IBBY 모두를 위한 책 한국 후보작으로 선정되었습니다. rineagreen@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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