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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보리얀 신경아 Feb 04. 2022

쉴만한 물가_삶이 있는 미술실

교육부장관상 수상 / 다문화 실천사례 교육수기 부문 최우수 2021

프롤로그        

   


“선생님은 왜…. 이런 학교에 곳에 오셨어요?”라고 묻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쉬는 시간에 미술실에 놀러 온 빡빡머리 남자아이가 저도 모르게 내뱉은 질문이었습니다. 아이의 새카만 눈동자는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많은 생각이 밀려왔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 글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내가 왜…. 하필 이런 곳에 가야 하지?’라고 생각했음을 고백합니다.

교육열로 유명한 학군지의 고등학교에서 고3 담임으로 치열하게 살았던 내가. 추천서와 자소서 더미에서 밤을 지새우며 제자들을 합격으로 이끌던 경력으로, 왜 비 학군지로, 그것도 하필 중학교로 가게 되었는지. 세상이 왜 나를 몰라주는지 서운했던 것이 사실이었어요.     


하지만 학교에 첫인사를 갔던 , 그보다  놀라운 사실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학교가 어떤 곳인지는 알고 오셨지요?” 교감 선생님이 물으셨어요.

“전혀 모르고 왔습니다.”

“우리 학교는 다문화 학교예요. 음…. 전교생의 87% 정도 되려나?”

“네에…?!!!”

“중국어랑 러시아어를 쓰는 아이들이 많아요.”

“그럼…. 수업은 어떻게 해요?”

“중국 아이들은 그래도 한국어를 잘하는 편이에요. 러시아 아이들이 소통이 잘 안 되긴 하지만…. 통역 선생님이 항상 계시니까 도움을 받을 수 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새로 발령받은 학교는 전국 최고의 외국인 밀집 지역인, 안산 원곡동 다문화 마을과 선부동 땟골 고려인 마을의 학교였던 것입니다. 100여 개국의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어 국경 없는 마을로 불리는 바로 그곳에, 저는 미술 교사로 부임했습니다.            




입학식        

   

중1 담임이 되었습니다. 영문으로 표기된 이름이 가득 차 있는 명렬표를 받았습니다. 외국인이 열여섯, 국제결혼 가정이 셋, 귀화 가정이 하나였습니다. 부모님 두 분 다 한국인인 아이는 스물세 명 중, 단 세 명뿐이었습니다.      


중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콩고민주공화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낯선 나라에서 온 아이들의 이름과 학부모님의 이름을 노트북과 핸드폰에 입력하는 것으로 새 학기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입학식 날이었습니다. 축하와 동시에 아이들은 작성해야 할 서류를 무더기로 받았습니다. 한숨을 푹푹 쉬며 번역기를 돌리는 진풍경이 펼쳐졌지요. 엉뚱한 내용을 적는 아이들이 수두룩해, 저는 손짓과 발짓을 섞어가며 뜻을 이해시키려 진땀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나라의 말을 하는 아이가 제 옆에 다가와 조용히 통역을 시작했습니다. 오늘 처음 만났지만 같은 언어를 쓰는 아이가 어려움에 처하자 도우려 나선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를 시작으로 세 명의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돌아다니며 한국어가 부족한 친구들의 통역을 도왔습니다. 아이들의 그런 모습은 오늘이 처음이 아닌 것처럼 능숙하고 자연스러워 보였어요.      


온종일 바쁘게 통역을 돕고 있는 아이들을 보자, 어느 순간 그 모습에 그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중첩되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이들도 한국어를 몰랐던 어린 시절, 친구들의 도움으로 적응했던 거였구나! 누군가의 따뜻한 도움에 기대 성장했고 이젠 자신이 돕는 입장이 되어 손을 내민 것이었구나….


아이들은 누구도 원해서 이 땅에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모님을 따라 입국하고 아무 준비 없이 학교에 적응해야만 했지요. 그 어리고 어린아이들이 서로에게 기대고 서로를 끌어주며 살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생기부에 써주시나요?' 학군지의 학교에서 도우미를 모집할 때면 늘 들었던 말입니다.

아이들은 얻는 것이 있어야 자신의 시간을 내는 것에 익숙했고 교사들 또한 생기부를 들이대며 아이들을 쉽게 움직이곤 했습니다. 그랬던 저에게 새 학교의 입학식 풍경은 제 마음속 단단했던 무언가를 무너뜨렸습니다.      


스물세 명의 아이들의 입학식이 아니었습니다. 자만심과 오만함이 무너진 한 사람, 바로 저의 입학식이었습니다. 18년 전, 교사로 살아가고자 했던 첫 마음 앞으로 다시 돌아가 서게 된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 중에서-


                  

아이들의 명렬표를 보고 첫 수업의 영감이 떠올랐습니다. 각자의 고국에서 불리던 낯선 이름들. 하나의 이름으로 불릴 뿐이지만, 정현종 시인의 시처럼 한 명 한 명 모두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품은 존재들입니다. 그 아이들의 이름 속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너의 이름은! 문자도로 들려주는 나의 이야기>라는 제목의 수업을 구상했어요.   

   

조선 시대 민화의 한 갈래 중 ‘문자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문자도는 한자의 의미와 관계가 있는 옛이야기를 글자 속에 그려 넣어 뜻을 이해하기 쉽게 구성한 그림입니다. 이 문자도의 형식을 빌려 아이들이 자신의 이름에 담긴 삶을 그림으로 풀이한다면, 언어를 뛰어넘어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완성된 그림들이 미술실 칠판에 붙기 시작하자 3학년 수업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와! 너 중국인이었어? 충격이네, 전혀 몰랐어!”

“몰랐냐? 근데…. 나 중국어 하나도 못 한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너희 엄마도 베트남이었어? 하…. 지금 알았네. 우리 학교에 베트남이 또 누가 있지?”

“야, 너네 할머니가 벨기에 사람이었어? 니가 흑인이라 가족들 다 아프리카인인 줄 알았지!”

“근데 지금은 한국인이야 귀화했거든.”      


3년이나 같이 지낸 친구들이었는데 서로에 대해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아이들은 칠판에 새 그림이 붙을 때마다 그 앞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할 때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지요.      



그러던 어느 날 눈에 띄는 그림이 보였습니다. 담임을 맡은 여자아이인데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하고 성격마저 수줍어 대화가 쉽지 않은 아이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림 속에는 남녀가 구름 위에서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날개가 달렸고 머리에는 동그란 관을 쓰고 있었어요.          

“천사구나!” 저는 아이에게 말을 붙이려고 다가갔습니다.

“음……. 아빠요.”

“와! 아빠가 천사처럼 마음이 고우신가 봐?”

“음…. 아빠 죽었어요” 순간 심장이 쿵 했습니다. 너무 놀랐지만 저는 애써 말을 이어갔어요

“그럼…. 이 여자는 누구야?”

“엄마요.” 그러고 보니 엄마 뒤에는 커다란 인도네시아 국기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름 위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있었습니다.

“You are perfect no matter what.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너는 완벽하단다….)"

돌아가신 아빠가 하늘에서 들려주시는 말이었습니다.

순간 눈물이 왈칵 터져 저는 마스크를 얼른 눈 밑으로 끌어당겨 올렸습니다. 수업을 어떻게든 마치고 아이들을 내보낸 뒤 저는 텅 빈 미술실에서 목놓아 울고 말았습니다.      


따뜻하고 슬픈 그림을 통해 저는 아이의 깊은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가정환경 조사서에는 아버지의 이름이 분명히 쓰여 있어 전혀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이었습니다.

한국인 아버지는 인도네시아에서 아내와 세 아이를 남겨두고 그만 사고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인도네시아인 어머니는 친정집에 삼 남매를 맡겨놓고 혼자 한국에 들어와 일하며 상황이 허락할 때마다 아이들을 한 명씩 데려왔습니다.      


한국에 살고 있지만, 아이에게는 무슬림 집안에서의 딸의 역할이 지워졌고 어머니가 일하시는 동안 가사를 도맡으며 오빠와 어린 동생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버거운 삶이었습니다. 힘들고 괴로울 때마다 천국에 계신 아빠가 보고 싶다고, 차라리 아빠에게 가고 싶다고도 말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혼자 감당하기 힘든 아이를 위해 저는 공문을 수시로 살펴보았습니다. 다문화, 다자녀, 기초생활 수급 조건으로 받을 수 있는 혜택이 많았습니다. 다문화 학생 비율이 특별히 높은 학교여서 외부의 지원도 찾아볼 수 있었고, 학교 안의 프로그램도 다양했습니다. 개인이 도울 수 없는 부분을 학교가, 지역 사회가, 사회적 기업이 촘촘하게 돕고 있었습니다. 저는 기회가 닿는 대로 아이에게 상담 프로그램을 연결해주었고, 추천서를 통해 장학금과 노트북을 받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그림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며 저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삶으로 조금씩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Добрый вечер 도브릐 비에체르! (좋은 저녁입니다)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서 온 친구들이 유독 많은 학교입니다. 땟골이라 불리는 고려인 마을이 학교 앞에 있기 때문이에요.      


신기한 점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미술에 흥미와 재능을 가진 고려인 친구들이 많습니다. 아름다운 색채 감각을 보고 있으면 그저 감탄이 나옵니다. 너무 멋지다! 이 부분의 색채가, 묘사가, 형태가 훌륭하다고 칭찬을 해주지만 고려인 아이들은 한국어 실력이 많이 뒤처져 칭찬의 의미를 모르는 경우가 많지요.   

  

어느 날 수업 중이었어요. 미술실 밖에서 카자흐스탄에서 온 한 여자아이가 저를 불렀습니다. 미술을 너무 좋아하는 아이였습니다. 가정사가 복잡한 데다 학교에 적응을 못 해 혼자서라도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고 들었습니다. 몇 주 째 무단결석이었는데 오랜만에 학교에 나온 모양이었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학교 안 나와요. 일하러 가요. 미술 좋아요.”


'아르바이트 때문에 학교를 또 빠지겠다는 말인가?' 말도 통하지 않았고 수업 중이니 우선 간단한 인사만 하고 아이를 교실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가다 말고 다시 돌아와 저를 꼭 껴안는 거였습니다.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오니 조금 전에 그 아이가 자퇴서를 내고 학교를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작별의 인사를 하려고 저를 찾아왔던 것이었어요! 자기 나름대로 한국어로 이별의 말을 준비해서 말이에요.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저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습니다. 그 중요한 순간에 아이에게 해주었어야 할 말이 가슴의 응어리가 되어 저를 슬프게 했습니다.


‘꼭 기억해줘…. 네가 어디에 있든 선생님이 너를 위해 기도할게!’   

   

왜 아이들 말을 배워 볼 생각을 하지 못했나…! 다시 한번 이런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때는 다정한 말 한마디를 건네고 싶다는 절실한 바람은 강렬한 동기가 되어, 저를 러시아어 수업으로 이끌었습니다.      


저는 지금 일주일에 두 번, 안산시 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러시아어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정신없는 일과를 마치고 퇴근 후 zoom에 접속하면 강사 선생님은 ‘Добрый вечер! 좋은 저녁입니다!’하고 인사합니다.

이 좋은 저녁에 퇴근의 기쁨을 반납하고 러시아어를 공부하는 선생님 한 분 한 분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을 거예요. 어쩌면 저와 같이 잊을 수 없는 제자를 맘속에 품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에서 온 미술 시간      


학교와 아이들에 대해 알아갈수록 미술 수업의 새로운 영감이 떠오르곤 합니다. 아이들의 삶으로부터 수업을 계획하니 예전에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프로젝트를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림으로 소개하는 여러 나라 

   

아이들과 동포 이주 역사 강의를 들었을 때, 동포란 같은 DNA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배웠습니다. 우리 학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조선족과 고려인 아이들은 언어가 다르지만,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로 이어지는 문화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미술에서 ‘먹의 문화’로 정의해보았어요. 먹은 아시아 미술을 하나로 잇는 상징이라고 생각했기에 먹물을 이용한 프로젝트 수업을 구성해보았습니다.

소개하고 싶은 나라 한 곳을 조사해 그 나라의 동물(영모화), 식물(화훼화), 인물(인물화), 풍경(산수화), 정물(기명절지화)을 연습해보고 최종적으로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하는 수업이었습니다. 작품의 틀은 동양의 서화 재료인 족자로 통일했지만, 각양각색의 문화가 개성 있게 담긴 생생하고 재미난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관산 말모이      


온종일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다 보니 자연스레 다양한 언어를 접하게 됩니다. 그 아이들이 친해지면 서로의 모국어를 궁금해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학교의 언어를 모은 그림카드 디자인, <관산 말모이> 수업을 진행해보았습니다. 모둠이 협동하는 수업으로 하나의 주제를 정하고 주제 안의 50개의 단어를 선정해 3개국어 이상의 그림카드로 표현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아이들은 각자의 역할을 똑똑하게 나누었습니다. 밑그림 담당, 채색 담당, 중국어 담당, 러시아어 담당…. 모두가 머리를 맞대어 사전을 찾고 번역하며 개성이 듬뿍 담긴 우리만의 말모이(사전)를 만들어내었습니다.




다문화 로고 디자인     


혁신학교 컨퍼런스 데이를 기념하여 다문화 학교의 상징인 로고를 디자인했습니다. ‘다문화란 OO이다. 왜냐하면, OO이기 때문이다.’라는 주제어를 쓰게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로고를 디자인했지요. 결과물은 예상을 뛰어넘었습니다. 흔히 보는 다문화 미술 행사의 결과물인 차별, 피부색, 평등 같은 주제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나왔어요. 아이들의 입에서 나온 다문화는 감사와 희망, 조화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 로고들은 컨퍼런스 데이의 영상으로 제작되어 큰 화면으로 상영했는데 교사들의 가슴에 묵직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세계가 모인 우리 동네, 나만 아는 맛집을 소개합니다     


학교 앞에는 다문화 음식 거리가 있습니다. 주말이면 전국에서 모여드는 외국인들로 북새통을 이룹니다. 고려인 마을에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음식을 파는 가게들이 모여있어요. 아이들과 가까워지자 이 거리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가족의 단골 가게도 알려주고, 간식을 사러 들르는 마트도 소개해주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곳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가정도 있었습니다. 아이들 덕분에 인터넷에도 알려지지 않는 숨은 맛집들을 탐험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알고 있는 맛집과 메뉴를 하나씩만 소개해주어도 우리 동네 맛지도를 완성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메뉴판을 디자인하고 입체로 음식 모형을 만드는, <세계가 모인 우리 동네, 나만 아는 맛집을 소개합니다>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지역 사회와 연계하여 전시회를 열고 싶은 바람입니다.



쉴만한 물가      


학교에 발령받은 지 두 달쯤 지났을 때였어요. 점심시간에 불이 꺼진 미술실로 들어가는 아이들이 보였습니다. 숨어서 무슨 장난을 치려나? 불안한 마음에 따라가 문을 열어보았어요. 그러자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불이 꺼진 교실에는 아이들이 모여있었어요. 작품을 붙여놓은 칠판 앞에 쪼르르 앉아 그림을 감상하며 자기 나라말로 조곤조곤 이야기하고 있었지요. 그 광경에 한참 동안 말을 잃고 조용히 서 있었습니다.   

  

점심시간마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미술실로 작품을 구경하러 왔어요. 저는 미술실에 늘 밝게 불을 켜두었습니다. 재료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자 점심시간과 방과 후에 창작하는 아이들이 생겼습니다. 그 모습이 꼭 옹달샘에 모여드는 새들처럼 사랑스럽고 예뻤어요.

아이들은 잘하든 못하든 자기 작품을 늘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래서 작품을 칠판에 붙여주었어요. 작품 수가 점점 많아지자 전시해줄 공간이 부족해졌습니다. 그래서 비어있는 학교 복도와 게시판을 활용해보기로 했습니다. 학교가 한마음으로 아이들의 작품을 사랑해주셔서 많은 분들이 발 벗고 나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시설 주무관님은 흔쾌히 100여 개의 못을 박아주셨지요. 한 학기가 지나자 학교 곳곳에 아이들의 작품 300여 점을 전시할 수 있었습니다.      


미술실을 활용하기 시작하자, 특별실 리모델링 예산이 시에서 내려왔습니다. 마치 아이들에게 주는 선물 같았지요! 교장, 교감 선생님은 하고 싶은 공사는 무엇이든 해도 된다며 모든 결정권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된 아트스튜디오를 만들어보기로 마음먹었어요. 저는 수업 틈틈이 미술실에 필요한 가구의 형태와 치수를 하나하나 디자인해보았습니다. 미술실 안과 바깥에 전시할 수 있는 공간도 네 군데를 만들었어요. 평소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은지라 페인트 브랜드와 색상, 칠판 재질과 프레임 색상, 갤러리 조명과 색온도 등 세부적인 것을 알아보고 결정하는 과정이 즐거웠어요. 무엇보다 학교 구성원들이 힘을 보태주셔서 기쁘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다문화 학교인 우리 학교에서 제가 꿈꾼 미술실은 아이들에게 쉴만한 물가를 만들어주는 것이었어요. 어느 나라에서 온 누구의 자녀이든, 좋은 재료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고 언어를 뛰어넘어 맘속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내는 곳….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 학창 시절의 미술실을 떠올리면 사랑받고 위로받았던 따뜻한 장소로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에필로그         

  


세상과 동떨어진 오지로 왔다고 생각했던 이곳은 세계의 시작이었습니다.

우리 학교에 와서 제가 얼마나 작은 존재였는지, 얼마나 편협하게 살아왔는지 느끼며 매일 매일 낮아집니다.     

“선생님은 왜…. 이런 학교에 곳에 오셨어요?”

아이의 새카만 눈동자는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배우러 왔어. 너희들에게 배우러…. 세계의 곳곳에서 별처럼 빛나는 너희들이 이 작은 미술실에 와주어 내 세상을 넓혀주었어.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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