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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란, 결혼식 날의 비극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

by 해리

레바논의 첫 관문인 수도 베이루트 라픽 하리리 국제공항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인상을 준다. 한 국가를 대표하는 공항이라기보다는 어떤 개도국의 지방 공항과 같은 느낌을 준다. 오래된 건물에 침침한 콘크리트 인테리어와 공항 이용객 대비 좀 과하게 많다고 느껴질 무장경찰들의 위압적인 존재감은 갓 도착하는 방문객에게 어떠한 안도감을 허락하지 않는다.

베이루트에 도착하기 직전 이용한 이웃 요르단의 알리아 여왕 국제공항이 현대적인 대리석으로 장식된 웅장함을 뽐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베이루트 시내로 향하는 길에서 마주한 풍경 역시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요르단의 말끔한 도로와 정숙한 교통질서와는 달리, 베이루트는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경적 소리와 파진 곳이 많은 울퉁불퉁한 도로 위에서 서로 먼저 가려고 양보 없이 들이대는 차량들이 도시의 혼란스러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마치 이곳에 있으면서 평화로이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얘기라도 하는 듯이.


하지만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도시 곳곳에 남겨진 전쟁의 흔적들이다. 많은 건물 벽면에 새겨진 무수한 총탄 자국들과 폭격으로 부분적으로 무너진 채 방치된 건물들 사이로 일상을 살아가는 베이루트 시민들의 모습은 묘한 위화감을 자아낸다.

일전에 방문했던 광주의 전일빌딩 245가 떠오른다. 레바논의 내전은 광주 민주화운동 기간에 비해 훨씬 길었지만(1975-1990) 비교적 동시대의 역사 사건으로 볼 수 있는데, 둘 간의 차이라면 광주에서는 역사적 교훈을 위해 의도적으로 보존된 총탄 자국인 것과 달리, 이곳의 상흔들은 단지 수리할 여력이 없어 방치된 것이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이러한 환경에 완전히 적응해 일상을 영위하는 모습이 새삼 인간의 놀라운 적응력에 경의를 표하게 만든다.


베이루트의 현재 모습은 그 찬란했던 과거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베이루트는 ‘중동의 파리’라 불릴 만큼 세련되고 화려한 도시였다. 프랑스의 신탁통치(1918년-1946년) 영향으로 형성된 유럽적 문화와 지중해의 아름다운 해안선은 유럽의 부유한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자석과 같았다. 옛 엽서와 기념품에 담긴 베이루트의 모습은 지중해의 노을을 배경으로 와인을 음미하는 여유로운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국가 성립 초기, 레바논은 중동 국가들 중 유일하게 기독교인의 수가 무슬림보다 많은 독특한 정체성을 지닌 ‘문화적 섬’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이 평화와 번영은 오래가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스라엘 건국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수십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처음에는 요르단을 거쳐 결국엔 레바논 남부로 유입되면서 갈등의 씨앗이 뿌려졌다. 이들 중 일부가 이란과 시리아의 지원을 받아 이스라엘을 향한 무장투쟁을 시작하면서, 레바논 영토는 의도치 않게 갈등의 무대가 되었다.


이 상황은 마치 손님이 주인의 집에 머물며 이웃과 끊임없이 싸움을 벌이는 형국이었고, 자연스럽게 레바논 내 기득권층이던 기독교인들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향한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 갈등은 점차 서로를 향한 증오로, 결국 1975년 내전의 시작으로 폭발했다.


공식적으로는 15년 동안 계속된 내전은 1990년에 아랍리그(Arab League) 국가들의 중재로 어렵게 평화협정을 맺으며 일단락되지만, 그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내전 이후 레바논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정치 체계를 도입했다. 대통령은 기독교인이, 국무총리는 무슬림 수니파가, 국회의장은 무슬림 시아파가 맡는 종교적 권력 분담 시스템인데, 실질적으로는 어떠한 정책에도 합의를 도출하기 어렵게 만드는 분열의 시스템으로 작용했다.


종교적 갈등과 정치적 부패가 맞물리며 레바논은 내전 종결 후에도 무장 충돌과 테러가 끊이지 않았다. 2005년 총리 라픽 하리리의 폭탄 테러 암살은 이러한 불안정의 절정이었다. 그리고 2006년,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의 도발로 시작된 이스라엘과의 전쟁은 레바논에 결정타를 안겼다.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공항을 비롯한 베이루트 주요 기반시설이 파괴되었다. 현재까지도 이스라엘을 방문한 기록이 여권에 있으면 레바논 입국이 거부될 정도로 두 국가의 적대 관계는 깊다.


레바논의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11년 시작된 이웃 시리아 내전은 또 다른 파도를 일으켰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 붕괴 시까지 레바논과 시리아는 실질적으로 구분 없는 같은 지역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자, 많은 시리아인들이 자연스럽게 레바논으로 피난했다.


2015년 절정기에는 약 120만 명의 시리아 난민이 레바논에 거주했는데, 이는 당시 레바논 총인구 640만 명의 약 20%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가 영구 정착지로 변한 경험 때문에, 레바논 정부는 시리아 난민을 위한 공식 캠프 조성을 주저했고, 그 결과 난민들은 국경 지역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비공식 정착촌을 형성했는데, 이는 난민들을 돕기 위해 세워진 국내외 NGO들이 효율적으로 필요한 물품 등을 배분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어렵게 만든 요인이기도 하다.


레바논은 지형적으로 레바논 산맥을 중심으로 서쪽의 지중해 연안 도시들과 동쪽의 베카 계곡으로 나뉜다. 시리아의 국경에 접한 베카 계곡(계곡이라 표하지만 실제로 두 산맥 사이에 있는 꽤 넓은 비옥한 농지 지대이다)에는 헤즈볼라의 본부가 있는 발벡이 위치한다. 무장정파이자 많은 서방 국가들로부터는 테러리스트 조직이라 지정되었고, 근래에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 후 국경 북쪽에서 계속해서 도발을 해 하마터면 중동에서의 전쟁이 확장될 뻔하게 만들었던 그 헤즈볼라(“알라의 당”이라는 뜻)이다. 헤즈볼라 본부라는 이유로 대한민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가 안전상의 이유로 자국민의 방문을 금지 또는 자제 권고하는 도시가 발벡이다.


그러나 발벡의 진정한 보물은 따로 있다. 도시 중심에 우뚝 서 있는 웅장한 로마 제국의 신전은 그 어떤 이슬람 건축물 못지않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 비너스와 로마 신전 다음으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이 주피터 신전은 고대 로마의 영광을 고스란히 담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헤즈볼라의 존재로 인해 많은 관광객들이 이 놀라운 문화유산을 접할 기회를 잃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로 인해 베이루트에서부터 픽서를 구해 이곳을 방문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이다. 상당수의 시리아 난민 정착촌은 발벡을 기점으로 국경에 가깝게 남북으로 길게 퍼져있고 특히 도시 북쪽으로 있는 상당수의 난민 정착촌들은 많은 NGO들이 치안 문제 때문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던 지역이라 난민들이 처한 환경이 그 어디보다도 더 열악하다고 베이루트에서 만난 활동가들이 이야기해 줬다. 나는 그런 열악한 환경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지만 비싼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 베이루트에서 그곳까지 가려할 픽서를 찾기가 의외로 힘들었다는 것이다.


일단은 차를 렌트해 홀로 베카 계곡을 향해 운전하기 시작했다. 레바논 산맥의 최고점 고개를 넘어서기 시작하면서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체크포인트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외국인 홀로 운전하는 차를 본 군인들은 어김없이 나를 특정해 차를 검색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검색하는 동안 동편으로 멀리 내려다보이는 베카 계곡이 꽤 광활했다. 그리고 그 광활한 평야에서 동쪽으로 눈길을 조금만 더 돌리면 레바논 산맥과 평행으로 뻗어져 있는 안티 레바논 산맥의 설산이 보인다. 왠지 모르게 시리게 느껴졌다. 저 산맥에서부터가 시리아 영토. 그 산맥 너머에 지금 무수하게 많은 사람들이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베카 계곡에 도달해 북쪽으로 2시간 여를 더 달려 발벡의 초입에 도달한다. 그리고 곳곳에 나부끼는 노란 배경에 총을 번쩍 들고 있는 초록색 문양의 깃발들을 보며 헤즈볼라의 본거지로 들어섰음을 알 수 있었다.


주피터 신전은 금세 모습을 드러냈다. 직접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슬람 문화 색채가 너무나 강한 이 작은 도시에서 정중앙에 위치해 주위의 작은 건물들을 완전히 압도하고 서있는 로마 신전이라니. 겨울철임에도 정오경의 강한 햇살은 신전의 벽면을 따뜻하게 데워주었고 난 일단 신전을 먼저 둘러보고 다음 일을 생각하기로 결정했다. 주피터 신전의 거대한 기둥들 사이에 누워 고대에 이 커다란 돌덩어리들을 옮겨와 신전을 짓고 있는 일꾼들과 그 이후에 이 공간을 지나갔을 무수한 영혼들을 상상했다. 한편으로는 그 커다란 신전을 전세 낸 듯 홀로 걸어 다닐 수 있다는 묘한 흥분감에 들떠하면서도, 이런 엄청난 유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치적인 불안정으로 더 많은 이들이 내가 당시에 느끼던 감정을 느낄 기회가 많지 않은 것은 조금 안타까웠다.


발벡에서의 경험은 예상치 못한 만남으로 더욱 특별해졌다. 군인들의 검문을 받고 있을 때, 내 앞에 있던 2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군인들로부터 한동안 붙잡혀 있던 나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내가 풀려나자마자 내게 걸어온다.


“혹시 도움 필요해?”


질란이라는 이름의 그녀는 베이루트에서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본디는 베이루트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방금 집에서 나와 정류장 쪽으로 걸어가다 내가 군인들로부터 해코지당하는 것처럼 보여 일단 멈춰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누군가가 도시에 있는지 잠시 생각하다 이내 마음을 바꿔 자신을 따라오라고 한다. 베이루트에 가려던 일정을 바꿔 본인이 며칠 동안 나를 도와주기 위해 남아있겠다고 한 것이다.


질란의 가족은 로마 신전 가까이에 살고 있었다. 그들의 작은 집은 질란과 두 여동생, 그리고 부모님이 함께 생활하는 따뜻한 공간이었다. 질란의 어머니는 유쾌한 농담을 즐겨하며 가족을 웃게 만드는 존재였고, 아버지는 늘 온화한 미소로 가족을 지켜보는 듬직한 인물처럼 느껴졌다.


며칠간 그들과 교류하면서 질란과는 발벡과 근교의 난민들을 만나러 다녔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매 끼니마다 밥을 챙겨주려 전화를 하거나 자신의 지인들을 통해 이야기가 있는 난민들을 찾아주어 꽤 효율적으로 발벡에서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현 시리아 상황과 자신의 도시에도 많이 유입되어 사는 시리아인들을 어찌 생각하는지 질란의 가족에게도 물어봤다. 이 시점에는 시리아 난민들에 대한 레바논 사람들의 의견은 꽤 크게 갈렸는데 아무래도 레바논 인구 대비 너무나 많은 난민들이 국경을 넘어와서 발생한 문제들에 대해 피로함을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질란의 가족과 같이 난민들이 올 수밖에 없었던 그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그 사정을 이해해주려 하는 이들도 여전히 꽤 있다고 얘기해 준다.


그렇게 그들은 발벡에 있는 나의 가족이 되었다.

그 첫 만남 이후로 레바논을 방문할 때면, 꼭 발벡에 일이 없더라도 그들의 집을 찾았다. 질란의 어머니가 정성껏 준비하는 레바논 음식은 발벡을 방문을 늘 기대하게 만드는 특별한 이유가 되었다.

질란은 내가 발벡을 방문할 때마다 기꺼이 픽서 역할을 자처했다. 본인이 부재중이면 두 여동생들을 내게 붙여주며, 내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후에 난민들과의 여정을 담은 내 작업이 내셔널지오그래픽과 같은 매체 등을 통해 소개되고, 소셜미디어에서도 주목을 받게 되었을 때, 질란은 마치 자신의 일인 양 기뻐했다.


“해리, 너의 작업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어서 너무 기뻐.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이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네.”


어느 날, 질란으로부터 뜻밖의 문자를 받았다.


“해리, 나 곧 결혼해. 현재 프랑스에 살고 있는 레바논 사람인데 혹시 결혼식에 올 수 있겠어?”


약혼을 할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가 받은 희소식이었다.


“당연하지. 너무 축하해. 언제야?”


“4월에. 한데 하나 더 부탁해도 돼? 아니라고 할 것 같긴 한데 혹시 결혼식날 우리 사진 찍어줄 수 있어?”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질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 부탁이면 당연히 해줘야지. 우리 첫 만남 기억해? 그때 네가 내게 보여준 친절에 보답할 방법이 생겼으니 기꺼이 해야지.”


결혼식 전, 질란이 프랑스를 방문할 때 우리는 파리에서 만났다. 바스티유 광장 근처에서 만나 맥주를 마시며 그녀는 신랑이 될 마지드를 소개했다. 선한 인상의 그는 두바이의 한 국제학교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결혼 후에는 질란도 두바이로 건너가 함께 살 계획이라고 했다.


오랜만에 만난 질란은 들떠있었다. “해리, 나 너무 신나서 친구들한테 내셔널지오그래픽에도 소개된 내 사진작가 친구가 결혼식 사진 찍어줄 거라고 자랑 엄청 했어! 네가 결혼식 참석자 중에 레바논 사람이 아닌 유일한 게스트일 텐데, 레바논 결혼식 본 적 없지? 정신없을 거야. 그래도 오면 나한테는 너무 큰 의미일 거야. 고마워.”


결혼식이 있던 그 해 봄, 나는 이라크에서 최전방에서 시간을 보내다 베이루트로 넘어갔다. 이라크와 레바논은 지리적으로 가까웠지만,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우리가 탄 비행기는 터키로 우회해야 했다. 전쟁 지역에서 죽음이 더 흔하게 얘기되던 곳에서,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이 꽃피는 결혼식장으로 향하는 여정이 묘한 대비로 다가왔다.


처음 방문했을 때는 낙후되고 조금 삭막하기까지 느껴졌던 베이루트 공항도 이제는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나는 듯한 편안함을 주었다. ‘인간의 적응력’에 대해 새삼 생각하며 베이루트 시내에 숙소를 잡고, 며칠을 보낸 후 결혼식 전날 발벡으로 향했다.


중동에서는 결혼식 전날에도 큰 규모의 피로연을 여는 전통이 있었다. 질란은 꼭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호기심에 호텔에 체크인한 후 바로 파티장으로 향했다.


적막함이 감도는 발벡의 밤, 유일하게 음악이 흘러나오는 건물이 멀리서도 파티장임을 알 수 있었다. 고층 건물 꼭대기 층에 마련된 연회장에 들어서자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강렬한 아랍 음악과 함께, 무대에서는 열댓 명의 젊은이들이 답케(Dabke)라는 전통 춤을 추고 있었다.

원형으로 늘어선 참여자들은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거나 팔짱을 끼고, 북소리에 맞춰 일제히 몸을 한쪽으로 기울이고 다리를 교차하며 춤을 췄다. 마치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모든 사람이 동작을 맞추지 않으면 그 모양새가 꽤 흐트러질듯해 보이던 고난도의 춤처럼 보였다.


그때 질란의 엄마가 환한 미소로 다가와 나를 포옹했다.


“해리, 와줘서 고마워. 질란이 네가 온다고 했을 때 정말 기뻤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따뜻함이 있었다.


그녀는 내게 답케에 참여하라고 권했다. 내가 “저 멋진 춤이 엉망이 될 거예요”라며 극구 사양하자, 그녀는 예의 익살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흘겨보며 웃음 짓더니 이내 다른 손님들을 맞이하러 자리를 떠났다.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음악에 조금 정신이 없었지만 다들 조금 지칠 무렵, 전통 의상으로 차려입은 질란의 외할아버지가 결혼을 앞둔 커플에게 덕담을 해주는 시간을 가졌다. 모두들 경청할 때, 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질란과 어머니에게 향했다.


질란의 어머니는 피곤해 보였지만, 그 눈빛만은 맏딸을 향한 무한한 자부심과 사랑으로 가득했다. 질란은 수줍게 웃으며 할아버지와 부모님을 바라보았고, 그 눈빛에는 깊은 감사와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들 사이에 흐르는 깊은 유대감을 느끼며 마음이 뭉클해졌다. ‘내일 결혼식은 아주 감동적인 날이 되겠구나’라는 확신을 안고 나는 피로연장을 나섰다. 다음 날의 행복한 순간들을 상상하며, 그 누구도 몇 시간 후에 일어날 비극을 예상하지 못했다.


결혼식 당일 아침, 나는 질란의 가족들에게 인사를 건네기 위해 집을 찾았다. 질란의 동생 린과 약혼자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린은 질란과 막내동생은 근처 미용실에 갔다고 금방 돌아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얘기했다.


그때였다. 집 안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시간이 멈춘 듯한 몇 초간의 정적 후, 질란의 사촌이 창백한 얼굴로 뛰쳐나왔는데, 그의 표정에서 무언가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걸 이미 알 수 있었다.


“아악! 이모가 갑자기 쓰러졌어. 어떻게 해! 어떻게 해야 해?” 그의 목소리는 공포와 떨림으로 가득했다.


린의 약혼자는 지체 없이 집 안으로 달려들어가 질란의 어머니를 뒤에 업은 채 나타났다.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조차도 구분이 안 되었지만 얼굴은 창백해 보였다. 그는 그대로 병원을 향해 달려 나갔다.


마당은 순식간에 혼돈으로 변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가족들은 남녀 구분 없이 우왕좌왕했다. 어떤 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부짖었고, 또 다른 이는 넋이 나간 듯 허공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넋이 나간 질란의 아버지는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안은 채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다가, 다른 친척의 부축을 받으며 뒤늦게 병원으로 향했다.


남아 있던 친지들은 그저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웠고, 계속해서 병원에 연락을 취했지만, 아무도 질란의 어머니 상태에 대해 명쾌하게 답해주지 못하는 듯했다. 공기의 밀도가 마치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을 밑으로 끌어당기는 듯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먼 골목에서 엉엉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이들이 그 울음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지만, 직접 듣기 전까지는 애써 부정하려는 듯했다

린의 약혼자였다. 온 마음이 다 드러나도록 정말 서럽게 울면서 마당으로 들어왔다.


“어머니가… 어머니가…” 그는 말을 잇지 못하며 다시 서럽게 소리 내어 울었다.


그렇게 질란의 어머니는 맏딸의 결혼식 날, 세상을 떠났다.


순간 전날 어머니와 나눈 마지막 대화가 떠올랐다. 답케 춤을 추지 않는다고 장난스럽게 핀잔을 주던 그녀의 눈빛, “결혼식 끝나고 네가 좋아하는 몇 가지 레바논 음식 해놓을 테니 먹으러 와”한 초대가 우리의 마지막이 될 줄은 알지 못했다.


집 마당 곳곳에 꽂아두었던 빨간 장미들은 어느새 하얀 백합으로 대체되었다. 결혼식을 위해 준비했던 화려한 장식들은 모두 거두어졌고, 축하의 음악 대신 코란을 읊는 목소리가 집을 채웠다.


질란은 마루턱에 앉아 울고 있던 동생들을 품에 안고 있었다. 동생들이 큰 소리로 흐느낄 때마다 그녀는 등을 쓰다듬으며 위로했지만, 자신의 눈에서도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며 그저 멍하게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맏딸로서의 책임감이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잠시 후, 어머니의 시신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다섯 가족이 함께 잠들던 위층 방으로 모셔졌다. 여자 친지들만 방에 들어가 염을 하며 기도를 올리는 동안, 밖에서는 또 다른 슬픔의 표현이 계속되었다.


감정을 주체 못 하던 질란의 사촌 동생이 차에서 AK-47 소총을 꺼내 들고 하늘을 향해 발사하기 시작했다. 총성이 고요한 발벡의 하늘에 울려 퍼졌다. 레바논에서는 익숙한 슬픔을 표현하는 의식이었다.


염과 기도를 마친 후, 어머니의 관이 마당으로 나왔다. 질란의 집에서 2km 떨어진 묘지까지, 우리는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행렬이 마을을 지나는 동안, 수많은 주민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합류했다. 곧 수백 명, 어쩌면 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걸었다.

묘지에서의 의식은 간결했다. 염을 할 때와는 반대로 장지에서는 남자들만이 입장을 해서 관을 묻고 기도를 간략히 마친 후에 곧바로 해산하였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문상객의 추도를 받은 후 장지로 가는 것이 아닌, 묘지에서 매장을 마친 후부터 며칠간 문상객들을 받는다. 추도 기간 동안 문상객들을 맞이하며 예의를 갖추던 질란의 가족은 마지막 손님이 떠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들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북적거리던 집에는 이제 적막만이 감돌았다.


다음날 아침, 나는 다시 질란의 집을 찾았다. 어머니의 부재가 만든 공허함과 쓸쓸함이 온 집안에 배어 있었다.


“결혼식은 나중에라도 따로 할 거야?” 조심스럽게 물었다.


“모르겠어. 아무 생각도 안 나지만… 따로 식을 하지는 못할 것 같아. 결혼 안 해도 되니까 그저 엄마가 곁으로 돌아올 수 있으면 좋겠어.”


밤새 울었는지 눈이 많이 부어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질란, 좀 생각해 봤는데… 우리 웨딩 촬영 하자. 아마도 너희 엄마도 사랑하는 딸의 가장 축복받아야 할 날이 자신 때문에 지워져 버린 것을 원치 않았을 거야. 엄마한테 보내는 편지 같은 느낌으로. 앞으로 잘 살아가겠다고 약속하는 심정으로 오늘을 사진으로 남기는 건 어때?”


질란은 한동안 침묵하다 마침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그래.”


촬영하러 가기 전에, 질란의 아버지가 마지드의 구두를 정성스럽게 닦아주는 모습이 내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그 작은 행위에 담긴 사랑의 제스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또는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는 메시지 같았다. 그 삶을 늘 정성을 가지고 올바른 방법으로 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라도 하듯.


본디는 결혼식장으로 가기 전에 로마 신전에서 촬영하려 했다. 하지만 장례를 마치자마자 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기에는 동네 사람들 눈이 부담된다는 질란 뜻을 존중해서 차를 타고 좀 떨어진 폐기차역에 가서 찍자고 제안했다. 그곳에서의 촬영은 조용히 진행되었다. 버려진 기차들 사이에서 질란과 마지드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순간순간 질란의 표정에는 슬픈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럴 때마다 마지드는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몇 년 후, 두바이에서 질란을 다시 만났을 때, 우리는 지난 세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여전히 유럽에 있었을 거라 생각에 연락할 생각조차 못했지만, 불과 몇 개월 전에는 한국에도 왔었다며 둘이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너희 엄마가 해주던 음식이 가끔 생각나,” 내가 말했다. “그립네.”


질란의 눈에 살짝 슬픔이 느껴졌다. “응. 나도 너무 그리워. 하루도 생각 안 한 날이 없을 정도로.”


그 말을 하는 질란의 손을 마지드가 살며시 잡았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이해와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 슬픔 속에서도 그들이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이 느껴졌다.


마치 레바논의 역사처럼, 상처와 아픔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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