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원 Apr 18. 2020

돌아보면 그저 물 흐르듯

공동육아를 시작하며.


 공동육아가 뭔지 아직 잘 모르던 시절. 공동육아는 커녕 어린이집이라는 세계조차 생소하던 내게 어느 날 한 생명이 찾아왔다. 산부인과에서 임신을 확인하고 돌아온 그 날, 몇 시간 동안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있다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엄마 나 애기 생긴 거 같아. 기분이 이상해”


 최대한 담담하게 전하려 했던 나의 목소리가 울먹거리며 작아졌다. 낯설고 생경하던 감정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나는 몰랐다. 그래도 배 속의 아이는 별일 없이 자라고 (임신 후기 들어서며 별일이 생기긴 했지만), 언젠가 생각했던 대로 남편과 나는 자연주의 출산을 해야겠다, 결심했다.


 자연주의 출산 카페에 가입하고 낳기도 전에 이미 아이를 낳은 것 마냥 출산 후기들로 간접 경험을 쌓아갈 때, 나는 그곳에서 ‘공동육아’라는 걸 알게 됐다. 자연주의 출산을 한 엄마들이 당연한듯 공동육아, 혹은 발도르프 교육을 지향하는 기관에 아이를 맡기고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지도 어플을 켜고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검색해봤다. 그런데 우리 집 바로 근처에 ‘ㄸㅂㄱ’라고 하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이 있는 게 아닌가? 잘 생각해보니 여기 지난번에 본 적이 있다. 친구와 함께 한 패브릭 쇼룸에 들렀는데 아이들 웃음소리와 재잘거리는 말소리가 끊이질 않고 그 앞에 무슨 무슨 어린이집이라는 팻말이 붙은 집이 하나 있었다. ‘저런 곳이면 나중에 나도 저기에 아이 를 보내고 싶다’ (이때는 심지어 아이도 없었는데) 그런 생각을 했던 곳이다. 검색창을 띄워두고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보다가 나는 마음을 굳혔다.


 ‘아이가 태어나면 나중에 여길 보내야지.’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나는 그 외에 다른 선택지는 만들지 않았다.


 

***
 
 중기까지 참 평화로운 임신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뜬금없이 임신성 당뇨 판정을 받고 그로부터 몇 주 후 조산 위험으로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절대 안정’이라는 강한 권고 아래 근 한 달을 누워만 지내며 (그 와중에 미리 정해둔 이삿날이 다가와 남편은 나 없이 혼자 집 이사를 하고) 매일 같이 병원 탈출을 꿈꿨다. 이게 다 내 잘못만 같아서 고요한 6인실 침대에서 맥없이 울곤 했다. 그래도 배 속의 아이는 제 몫을 다해 잘 자라주었고 조산의 파도를 무사히 넘기며 40주 3일, 남편과 나는 따뜻한 방 안에서 우리 사랑이를 만날 수 있었다.


 무사히 아이를 만난 기쁨으로 충만하던 날들. 그때까지만 해도 ‘삼 년 정도는 당연히 내가 데리고 있어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실전에 들어선 육아는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참 많더라. 인간의 간사한 마음은 ‘기관에는 두 돌 지나 3월 되면 보내볼까’로 스리슬쩍 계획을 변경했다. 그러던 중 우리에게 둘째 소식이 찾아온다. 가만, 예정일을 계산해보니 이대로라면 2월에 둘째가 태어난다. 2 월에 태어난 신생아를 집에 두고 3월에 아이와 함께 어린이집 적응을 시작한다?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둘째의 기쁨을 느낄 새도 없이 마음이 다급해졌다. 나는 무작정 등원 대기 신청을 해 둔 ㄸㅂㄱ 어린이집에 연락을 했다. 그리고는 뜻밖의 추가모집 소식을 들었다. 몇 주 후 면담을 했고 간절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심한 입덧으로 날마다 구역질과 싸우며 ‘이번에 안 되면 어쩌지’ 근심하던 때. 세상에나, 우리에게 선물처럼 등원 확정 연락이 왔다.
 

***


 2019년 10월 1일, 사랑이는 ㄸㅂㄱ 어린이집으로 첫 등원을 했다.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 등원이었 는지. 그런데 아이를 보내보고서야 알았다. 적응은 아이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터전에 아 이를 혼자 두고 나오던 첫날, 둘째 날... 엄마와 헤어지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 아이가 울며 손을 뻗을 때 나는 더욱더 환한 얼굴로 안녕을 하고 돌아서자마자 툭툭 눈물을 떨구곤 했다. 두 돌이 될 때까지 세 시간 이상 떨어져 본 적 없던 우리는, 잠깐 안녕을 하는 것에도 연습이 필요했다.


 그래도 첫 주에 함께 ㄸㅂㄱ 생활해 본 것이 도움이 많이 되더라. ’지금은 놀이터에서 놀고 있겠다’, ‘이제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폴폴 나겠네’, ‘아이들이 이불 펴고 잠자리 그림책 읽을 시간이구나.’ 함께 지내본 시간을 더듬어 아이의 시간을 상상해보고, 사랑이가 귀엽다며 그림을 그려주고 블록을 만들어주던 형님들의 씩씩한 표정을, 사랑이를 환하게 반겨주던 선생님들의 밝은 얼굴을 떠 올려보았다.


 아마 모두의 따뜻함 덕분이었을 것이다. 사랑이는 (생각보다 빠르게) 공식적인 적응 기간 마지막 날부터 울지않고 나와 안녕 할 수 있었다. 아이가 울지 않으니 나도 울지 않을 수 있었고 그로부 터 이 주 쯤 지나니 아이는 집에 늦게 가고 싶어하는 완벽한 ㄸㅂㄱ인이 되었다.


 ㄸㅂㄱ 생활과 함께 사랑이는 낯가림이 많이 줄었다. ‘엄마’, ‘아빠’, ‘우유’, ‘지지’ 두 음절로만 소통하 던 아이가 말이 늘었고 매일 같이 놀이터를 뛰어다니며 무릎이 단단해졌다. 밥을 더 복스럽게 먹 고 좋은 친구와 형님들도 생겨났다. 등원 길에, 터전에서, 하원 길에, 주말 동네 골목에서, 아이 이 름을 부르는 어른들이 늘었다. 가족이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로 듣는 아이 이름은 정말이지 부드 럽고 정답다. 각자 살기 바쁜 도시의 생활이다. 같은 동네에 살아도, 심지어 옆집에 살아도 서로 의 이름 조차 모르는 게 당연한 시대. 그런 때에 우리 아이를 따뜻하게 바라봐 주고 아이 이름을 포근하게 불러주고, 애정 어린 손길을 보내주는 동반자들이 생겼다. 나는 이것을 공동 육아가 가 진 가장 큰 힘이라고 느끼고 있다.
 

***


 며칠 전엔 하원 길에 사랑이가 무언가를 보고 “시럽! 시렵!” 하고 말했다. 아직 여러 단어가 익숙지 않은 사랑이기에 최대한 귀를 열고 해석에 들어간다. “사랑이 싫어? 뭐가 싫어?” 사랑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그게 아니란다. “아니야? 시리얼? 시리얼 먹고 싶어?”, 아니란다. 때마침 우리 앞에 트럭이 한 대 지나가고 사랑이는 다시 한번 “시럭!” 한다. “아~ 사랑이 트럭 이야기 했던 거구나?” 그랬더니 아이가 그제야 씩 웃는다. “사랑이가 트럭이라고 말했는데 엄마가 한 번에 못 알아들어서 사랑이 답답 했겠다, 그치?” 물으니, 아이는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다. 자기 뜻과 다르게 계속 다른 말 하는 엄마가 답답했을 법도 한데 괜찮다며 웃는 아이의 너그러움이 날 부드럽게 한다. 초저녁 하늘에 뜬 하얀 달을 보고 너무나 기뻐하며 “달!” 하고 외치고, 앞으로 갈 때마다 새롭게 보이는 달을 보며 마치 세상에 달이 열 두 개는 되는 양 “또또!” 말하는 아이의 맑음이 나의 가슴을 울린다.


 이렇게 맑고 고운 아이가 우리에게 오다니, 탄복하는 날들이다.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 감동하고, 이런 아이가 자신의 결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며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ㄸㅂㄱ에 다닐 수 있어 참 감사하다, 생각하는 요즘이다. 큰 고민 없이 당연하게 자연주의 출산을 결심했던 우리. 그 리고 자연스레 공동육아, 그리고 ㄸㅂㄱ 어린이집을 선택한 우리. 세 식구였던 우리가 이제 몇 달 후면 새로운 식구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매순간 새로운 사건들을 마주할 때면 그게 참 고비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모든 게 그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신생아와 함께 옥신각신할 몇 달 후를 상상하면 왠지 기분이 아득해 지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여태 우리가 그랬듯 자연스럽고 순조롭게 보낼 수 있을 거란 자신감도 생긴다.


 2020년에도 아름다울 우리의 날들을 기대하며, 
지금까지처럼 늘 그렇게, 우리의 삶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울 수 있기를, 조용히 기도해본다.




2019.12.06

매거진의 이전글 세 살 아이가 있는 저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