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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Apr 01. 2020

세 살 아이가 있는 저녁


아이와 둘이서 함께 하는 저녁. 문득 세 살 아이가 있는 집 치고는 참 조용하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사랑이는 혼자 그림책을 보며 놀고 있었다. 잠깐씩 무어라 단어 몇 개를 말할 때 빼고는 고요. 어린이집에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혼자 노는 시간도 길어지고 말도 많이 늘은 아이.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많아지니 책 보는 게 더 재미있는지 하원하고 나면 도도도 바로 책상으로 달려가 책을 쌓아두고 보기 시작한다. 나한테 읽어달라고 책을 내밀다가도, “사랑이!” 하고 자기가 책장을 넘겨 좋아하는 그림을 유심히 본다. 


책을 보다가 내가 필요한 경우는 좋아하는 특정 페이지를 찾을 때. <바바브라이트의 시계> 에서 물시계 나오는 그림이 보고 싶으면 “물!”, <새콤달콤 주스 만들기> 에서 건배하는 걸 보고 싶으면 “쨘!” <타요 스티커북>에서 건물에 불이 난 장면이 보고 싶으면 “불!” 하는 식으로 키워드를 말한다. 그렇게 해서 내가 그 페이지를 펼쳐 읽어주면 아주 흡족한 얼굴을 한다. 중간 중간 자동차를 가지고 놀거나 점토놀이를 하기도 하지만 상대적으로 그림책을 볼 때 가장 오랜 시간을 들이는 아이. 자기 전에도 책을 쌓아두고 보고, 검지 손가락 하나를 펴고 “딱! 딱!” 그러면서 한 권만 더 보고 불을 끄겠다고 표현한다. 그때부터 적어도 세 권은 더 보아야 불을 끌까 말까. 


11월 말부터 스마트폰과 TV를 차단하고 있다. 경찰차나 소방차 나오는 영상을 워낙에 좋아하는데 TV로 보면 안 나올때가 많아 TV는 진작에 스스로 안 보기 시작했지만, 대신 아무때나 경찰차나 소방차를 볼 수 있는 스마트폰에는 더 매달리는 역효과가 났다. 그러다 미디어 관련 강의를 듣게 됐는데 좀 더 적극적으로 차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 앞에선 스마트폰을 아예 사용하지 않았다. 영상은 물론이고 스피커에 연결해 동요나 라디오를 트는 것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아이가 “삐뽀!” 하면서 영상을 보겠다고 표현할 때 경찰차나 소방차 나오는 그림책을 펴서 보여주었다. 플립북을 새로 구매해 좀 더 다양하게 책으로 놀이하고, 이건 어떤 장면인지, 어떤 이름을 가진 사물인지 알려주었다. 말이 트이기 시작하면서 아이는 내가 말해주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흡수해나가기 시작했고 혼자서 그림책 보는 재미도 깨우쳤다. 전에는 저녁준비하는 동안이라도 잠깐 아이에게 시간을 얻기 위해 영상을 보여주곤 했지만 그게 아니어도 아이는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더라. 


자동차 노래를 좋아해서 그걸 틀어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어린아이에게는 일상의 소음 말고 다른 기계음들은 오히려 발달에 좋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노래를 듣고 싶어하면 엄마 목소리로 불러주고 (사실 이게 비교할 수 없이 더 좋은 소리일테다) 그렇지 않을 땐 그냥 조용히 두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보니 나도 아이도 함께 있는 시간이 더욱 평온해 졌음을 느낀다. 뭐든 가득찬 것은 좋지 않구나. 굳이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하기 보다 빈 여백 속에서 상상의 세계를 채워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구나. 깨달음이 있다.  


빈 시간을 잘 채워나가는 아이를 보는 것이 기쁘고 고맙다. 고요의 순간들을 좋아하는 나라서 더 그럴까. 아이 역시 고요하고 평온한 가운데 자기의 세계를 잘 쌓아올려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더 고운 말들을 엮어 아이에게 건네는 엄마이고 싶다. 



2019.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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