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강아솔 - 엄마
전체는 흐리지만 향기는 똑똑히 기억나는 순간이 있다. 초등학교 2, 3학년쯤의 일이다.
머리를 양갈래로 잘 땋고 다녔던 나는 그 날 무릎까지 오는 빨간색 코트를 입었었고
하늘에서는 코끝까지 시려오는 하얀 눈이 펑펑 내렸다.
아직 번호키가 그리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학교에 다녀와서 집 벨을 평소처럼 딩동 딩동 누르는데 집에 아무도 없었다.
평소대로라면 문 앞이나 1층에서 잠시 기다렸을 텐데 그 날은 이상하게도 밖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싶었다.
엄마가 차를 타고 주차장에 들어올 때 나를 딱 발견할 수 있도록, 엄마 오는 길목에서 그렇게 이번에는 내가 엄마를 맞이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삼십 분을 넘게 서있었다. 주차장 입구 앞에는 내가 다니던 유치원이 있었다. 그 울타리 앞에서 나는 얼굴이 땡땡해지도록 엄마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는 오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어 아파트 1층에 가서 잠시 서성이다가 혹시나 해서 집에 올라가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엄마는 집에 계셨다. 올 시간이 됐는데도 안 오던 딸아이가 땡땡 얼어서 들어오니 엄마는 나보다 더 놀란 표정이셨다. 알고 보니 엄마는 내가 유치원 앞에서 기다릴 때 다른 주차장 입구로 들어오셨다고. 생각보다 일이 늦어 부랴부랴 오셨는데도 조금 늦으셨다고 한다. 아차, 다른 입구가 있었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계속 기다렸던 것이고.
사실 나는 엄마한테 혼이 날 줄 알았다. 그만큼 기다렸는데 안 오면 들어와 있어야지, 이 날씨에 그렇다고 그렇게 서있으면 어떡하니, 이렇게 혼줄이 날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별로 안 추웠다며 눈치를 슬슬 살폈던 것 같다.
하지만 엄마는 이내 내 코트를 벗기고 옷을 갈아입히고는 나를 마루에 깔아놓았던 이불 밑으로 쏙 집어넣었다. 이불 밑은 온기로 뜨끈뜨끈했다. 그리고 그 당시 내가 좋아하던 만화를 틀어주시고는 코코아 한 잔을 가져다주셨다. 엄마 기다리느라고 많이 추웠겠다며 달달한 향이 곱게 퍼지는 코코아를 한 잔 가득 타 주셨다.
나는 조금 얼떨떨했다. 얼떨떨한데 너무나 포근했다. 아직도 그 시절의 나의 시점을 떠올릴 수 있다. 나는 따듯한 이불속에서 코를 찔찔 흘리며 한 손에는 내 머리만한 머그를 들고 있고 내 앞에는 만화가 펼쳐지고. 그리고 엄마는 곁에서 이불로 차가운 내 몸을 돌돌 싸며 다음에는 이런 일이 있으면 안에서 기다리라고 하셨다.
나는 가끔 이 기억을 하얗게 꺼내본다. 추운 날, 눈 오는 날, 더운 날, 따듯한 날 그리고 마음이 시려운 날. 그럴 때면 차가운 내 손에 쥐어주신 따듯한 코코아 한 잔이 겨우 내 맘을 댑펴준다.
그래서 오늘 다시 꺼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소음과 복잡함을 피해서 그 안전한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무더운 날에 코코아니 이불이 웬 말이겠냐만은.
결코 덮어도 덮어도 덥지 않다. 마셔도 마셔도 줄지 않는다.
내가 아직 작았을 때 나를 안아주었던 커다란 엄마의 마음은, 그 날의 코코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