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아야, 라고 어무가 부를 때 그 뱃속에서 여덟 달을 동동 떠 있다가 세상에 났음을 실감한다. 높은 ‘린’에서 시작해 ‘아’에서 꺾어 내려주고 ‘야’에서 ‘린’보다는 낮게 다시 올려 애매한 음으로 길게 늘어뜨리는 경상도 억양이 녹아 있어야 한다. 그렇게 부른 린아야, 뒤에는 린아를 자식으로 둔 어무만이 가질 수 있는 애정이 범벅된 문장이 따라 나온다.
그러면 언제고 어디서고 밀물결 같은 게 일렁이는 따스함을 느끼곤 한다. 유음과 비음이 실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억양은 햇빛이 부서지는 바닷물을 결결따라 넘실거린다. 나는 불퉁하게 자라 더는 ‘린아’같지가 않아서, 이제 1년에 한두 번 불릴까 말까 한 이름이지만, 그 한 단어면 고집스레 쌓아올렸던 마음의 벽이 무너진다. 미워하고 울고 날선 말로 상처주고 상처 입지만 세상에는 어무와 ‘린아’ 사이에만 가질 수 있는 끈질긴 무언가가 있다.
MIKA(이하 미카)는 이상하게 린아야를 연상시킨다. 마이클이라는 본명이 잘못 붙여진 이름이라며 세상에 알린 그의 아명은, 어린 시절에 붙들린 단단한 기억과 언어로 옮기지 않은 심지를 짊어진 단어처럼 들린다. 퍼레이드의 한 장면에 어울리는 활기찬 음악에 신나하다가도 사실 그 가사가 우울하거나 직설적이거나 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그러다가 또 함박웃음을 지으며 감격에 겨워하는 라이브 영상을 볼 때, 미카라는 프리즘으로 비춘 역사의 무지개를 훔쳐보는 착각이 든다.
그의 노래 세 곡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저런 데 배경음악으로 삽입되어 분명 어디서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일주일 내내 버스로 이동할 때마다 창밖을 보며 귀가 터져라 들었으니까 여러분도 가능한 귀가 버틸 수 있는 가장 큰 음량으로 듣기를 권한다!
01. I live for glitter, not you. “We are Golden”
We are not what you think we are, We are Golden, we are Golden.
Teenage dream in a teenage circus, running around like a clown on purpose.
Who gives a damn about a family you come from?
No giving up when you’re young and you want some
(...)
Now I’m sitting alone, I’m finally looking around.
Left here on my own, I’m gonna hurt myself.
Maybe losing my mind
I’m still wondering why, Had to let the world let it bleed me dry.
이 글에서 소개하는 노래들은 이 곡을 빼면 모두 1집 수록곡이다. 아예 ‘미카 1집의 노래들’ 쯤으로 글을 묶을 수 있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We are Golden>을 빼고서는 미카를 말할 수 없다.
<We are Golden>를 부르는 미카의 서로 다른 분위기 둘이 있다. 첫 번째는 뮤직비디오의 빨간 방에서 혼자 반나체로 날뛰는 모습이고, 두 번째는 2009년 내한 당시 팬들의 금가루 이벤트에 웃음을 터트리며 흥겨워하는 모습이다. 유년 시절 방에서 홀로 춤추던 시절을 기억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컨셉의 뮤비에서 그는 한껏 무서운 얼굴로 정면을 쏘아본다. 4분 남짓, We are golden이라는 반짝반짝한 가사의 반복과 개구쟁이 같은 목소리의 노래가 이어지는 내내, 갈비뼈를 셀 수 있을 만큼 깡마른 몸을 비틀고 사지를 접었다 폈다 뛰었다 굴렀다 하면서도 그는 절대 환하게 웃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진성과 가성을 발랄하게 넘나드는 목소리는 희망과 긍정보다는 만만찮은 반항에 가깝고, 춤추는 그 모습은 후반부의 노랫말처럼, 혼자 남겨진 채 어린 시절의 방 안을 둘러보며 세상에 받은 상처를 따지듯이 화면 가득 전시한다.
뮤직비디오를 본 뒤 바로 그 아래의 내한 영상을 보면 실수로 누군가의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처럼 가슴이 찌르르, 하다. 뮤직비디오 속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듯 춤추던 날들을 쌓고 쌓아 결국 활짝 핀 모습은 천진하고 새하얗다. 마침내 환하게 웃으면서 춤을 추고, We are Golden, 에 맞춰 온통 금가루 범벅이 된 공연장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괜한 향수를 자극한다. 나는 너를 위해 살지 않고, 빛나기 위해 살아, 이제껏 왜 세상이 나를 피말리도록 내버려뒀을까, 도망치는 것으로부터 도망쳐, 우린 금이야, 우린 금이야, 객석을 가득 메운 관중들이 한목소리로 외치는 걸 본다면 분명 주마등마냥 모든 날들이 스쳐지나갈 테다. 10년 후 영상으로 그 무대를 접하는 나에게마저 그러니까.
02. It don’t don’t make sense, “My Interpretation”
I don’t need an alibi or for you to realize
The things we left unsaid are only taking space up in our head
Make it my fault, win the game, point the finger, place the blame
And curse me up and down, it doesn’t matter now
Cuz I don’t care. If I ever talk to you again,
This is not about emotion, I don’t need a reason
Not to care what you say or what happened in the end
This is my interpretation and it don’t don’t make sense
<We are Golden>이 눈물이 고인 채 웃음을 터트려버리는 아릿하고 즐거운 감정을 선사한다면, <My Interpretation>은 직설적인 듯 알쏭달쏭한 가사를 곱씹으며 생각에 잠기게 한다. 대화 사이의 간극이 좁혀질 수 없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말 같기도, 서로의 까닭과 해석을 치열하게 나누다가 나가떨어진 연인에게 고하는 이별의 말 같기도 하다. 역시 적당히 잔잔하고 발랄한 선율에 서늘한 말들이 올라온다. 네가 이겼고, 네 말이 다 맞고, 나를 욕하고 저주하고 탓하라고, 근데 말도 안 되는 이게 그냥 나의 해석일 뿐이라고.
그런 속 편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얘기하고 해석하고 타협하고 이해시켜보려 애쓴 뒤 모든 걸 소진한 채 손을 놓아버리는 사람일 테다, 대상이 누구든 그런 경험을 안 했을 리가 없을 거다,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이 노래의 가사가 더욱 뾰족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통쾌함과 시니컬함 사이사이에 가사로 옮기지 않은 시간들이 엿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기까지의 수많은 말들은 각자의 머릿속에 둔 채로 입을 다물고, 그냥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다 했고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일축시키는 문장이 시리도록 창백하다.
03. Little bit of love, little bit of love.. "Happy Ending"
This is the way you left me, I’m not pretending
No hope no love no glory, no happy ending
This is the way that we love, like it’s forever
Then live the rest of our life. But not together...
<Happy Ending>은 우리나라에서 KB국민은행 광고음악으로 쓰여 처음 들은 순간부터 귀에 익었다. 광고 제작자도 해피엔딩이라는 제목과 평화로운 선율, 어우러지는 합창과 우주를 유영하는 뮤직비디오에 속은 게 틀림없다. 뜯어보면 이 노래도 역시나 어둡고 외로운 내용을 담는다. 가사가 전하는 희망도 명예도 해피엔딩도 없는 채로 각자의 남은 인생을 살아갈 모습은 어딘가 경건한 분위기까지 풍긴다. 오히려 이게 우리의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아무런 꾸밈없이 인정하는 사실, 담백하게 바라보아야 할 앞날. 아주 조금의 사랑, 아주 조금의 사랑, 아주 조금의 사랑... 같은 것들.
마냥 맑고 능숙한 그의 목소리는 가사를 염두에 두고 들으면 어딘가 그림자가 져 있다. 미카, 라는 귀여운 아명의 차양 뒤로 그의 모든 성장과 좌절의 역사가 놓인 것처럼, 만약 그 이름에 빛을 비춰 그의 무지개를 읽어낸다면 미카, 라는 단어를 전처럼 가볍게 삼켜낼 수 없을 것처럼. <Happy Ending>은 그의 이름을 가장 닮아 있다.
사실 노래는 외도록 들었고 라이브도 더는 볼 게 없을 만큼 찾아보았지만 내가 그에 대해 아는 바는 거의 없다. 그의 노래들, 무대에 선 표정, 아명이자 예명 미카와 본명 마이클이 내가 가진 정보의 대부분이고, 이 글을 쓰는 내내 이름 뒤에 숨겨진 역사 운운했지만 노래를 수십번 반복하다가 생겨난 망상이 크지 정작 아는 건 민망하리만치 없다.
하지만 미카의 음악은 린아야, 의 역사를 자꾸만 들춘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그 이름을 들었던 십몇 년 전부터 더는 그게 내 이름이라고 하기도 민망해진 지금까지의 날들을 빠르게 훑어낸다. 마음에 앉는 노랫말은 그 중 한 부분을 가차 없이 짚어대고, 고운 모래를 쓸어내듯 어루만지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We are Golden을 듣는 동안 나는 양 눈이 삐죽해지도록 꽉 묶은 양갈래 다섯 살, 금빛 해안가에서 빙글빙글 돌며 웃어댄다. My Interpretation을 듣는 동안은 어무와 지독하게 싸워 이름을 잃고 초라한 자존심을 내세운다. 그렇게 노래가 끝나고 보면 저편에서 린아야, 하는 어무 목소리가 들리고 만다.
그래서 나는 미카에 대한 망상을 린아의 역사에 빗대어 진짜인 척 한다. 그의 이름과 목소리로 부른 노래를 나의 이야기에, 아니 나의 이야기를 그의 이름과 목소리에 갖다 붙이면서 노래를 들을 때마다 혼자 괜히 절절해하는 것이다. 당신의 어떤 순간이 이 구절을 부르게 했는지, 당신의 역사, 아아니 나의 역사, 그러니까 내가 당신의 노래를 듣는 방식인 나의 당신의 역사는, 당신의 이름 안에 들어차 있다, 미카.
로마의 마지막 밤, 어버이날을 일주일 앞두고
린아와 린아의 어무와 아부와
당신의 역사에, 서룩 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