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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May 29. 2019

[몽상] 워싱턴 D.C.의 국립 미술관에서

우리는 왜 여행할까. 수 개월 열심히 번 돈을 투자하여 영위하는 일주일의 삶에는 어떤 의미가 깃들어 있을까.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온지 5일째. 학교 기숙사 침대에 누워 지난 3박 4일간의 워싱턴 D.C. 여행을 되돌아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여행하는 것은, 잃었거나 잊곤 했던 생동하는 감각을 되찾기 위해서라고.
 

한낮의 풍경마저도 이토록 다르다는 것은, 우리에게 즐거운 생각거리와 이야깃거리를 던져주기 때문에.


생각해보면,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은 그리 자주 찾아오는 경험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를 지탱하는 일상 속에서 불가피하게 관성에 젖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은, 일상으로부터의 탈피이자 관성으로부터의 탈피라는 점에서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다.

워싱턴 D.C.의 주택가는 높이가 낮은 전원주택들로 가득했다. 고층의 아파트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주택 앞에는 정원이 있었고 때로는 작은 분수가 물을 끊임없이 내뿜었고 때로는 주택을 가릴 정도로 커다란 꽃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는 걸으면서, 정원 있는 집에서 사는 것이 마음의 여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곳의 일상은 우리의 일상과 달랐고 이곳의 상식 또한 우리의 상식과는 달랐다. 식당에 가는 길에 우연히 눈이 마주친 여자는 나를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오랜만의 경험이었다. 드넓고 낯선 세계를 하루종일 걷다가 문득 생각했다. 나는 너무나 작고 좁은 세계에서 아등바등 살아왔었구나, 하고.

그러니까 여행이란,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값비싼 기회일지도 모른다. 삶이 멋지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더 멋지게 살겠다고 결심하게 해주는, 무척 비싼 기회.



National Art Gallery, 그리고 삶의 풍요


여행 중의 미술관은 그래서 특별하다. 예술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도 같은 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종종 새롭고, 일상의 관성으로부터 벗어나 있으며, 우리의 삶에 반짝이는 영감을 주곤 하니까. 그러니 여행 중에 겪는 미술관이란 얼마나 특별한 경험인가.
 


워싱턴 D.C.에서 우리가 방문한 미술관은 단 한 곳, 바로 국립미술관 서관이었다. 유럽의 신전과 같은 외관의 이 미술관에 들어서면, 13세기부터 19세기까지 수많은 화가들의 작품들이 펼쳐진다. 렘브란트부터 모네, 마네, 드가, 고갱, 그리고 고흐까지. 참고로 국립미술관 동관은 피카소부터 앤디 워홀까지, 다양한 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다루고 있다.
 


사람들은 마치 풍경화의 일부처럼, 미술관의 내부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여유롭게 산책하기도 했고, 눈앞의 작품을 오랫동안 응시하기도 했고, 바닥에 앉아 스케치를 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들은 여가 시간에 산책을 하러 이곳에 왔는지도 몰랐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반 고흐의 자화상이 있는 미술관을 산책 장소로 삼을 어떤 사람들이 문득 부러워졌다. 내게는 그것이 삶의 풍요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적확하게 말하자면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정신적 풍요, 혹은 영혼의 풍요였다. 지금의 내게는 부재하는 것들이었다.

Impressionism and Van Gogh



좀처럼 사진을 찍지 않는 관람객들이 한 데 모여서 사진을 찍던 작품이 있었다.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Ginevra de' Benci>, <지네브라데 벤치의 초상>이었다. 미국 미술관에서 유일하게 소장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유명한 화가의 그림보다도 내 눈을 반짝이게 한 것은 바로,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었다. 르누아르부터 모네, 마네, 쇠라, 르누아르, 드가, 세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걸출한 화가들의 작품이 '19th Impressionism' 코너에 모여 있었다.


Auguste Renoir


Pont Neuf, Paris
The Dancer


르누아르 그림의 색감을 좋아한다. 그의 시선이 내가 동경하는 파리의 퐁네프에 닿았을 때,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르누아르의 <Pont Neuf, Paris>를 카메라에 담으며 한없이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Claude Monet


Woman with a Parasol - Madame Monet and Her Son
The Japanese Footbridge


모네의 작품을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평생의 소원 중 하나가 프랑스 오랑쥬리 미술관에서 수련 연작을 관람하는 것이었는데, 이렇게라도 모네의 작품을 보게 되어 마음이 벅찼다.
 

Paul Cezanne


Still Life with Apples and Peaches
Chareau Noir
The Peppermint Bottle


예전부터 세잔의 정물화를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잔에 대하여 쓴 이석원의 글을 좋아했다. 그의 산문집 <보통의 존재>에 수록된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잔은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평생의 사업인 사람이었다. 그 실험의 대상은 사과였고, 그는 40년간 수많은 사과 정물화를 그리게 된다. 그럼에도 그가 사과의 본질을 명확히 이해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대상의 본질을 규정하는 데에 정답은 없기 때문이다. 이석원은 자신에게 세잔을 소개해준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의 본질의 의미를 묻는다. 그러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사과라는 대상을 객관화해서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노력 그 자체가 중요한 거야.
그것이 바로 사과에 대한 존중이기 때문에."

나는 다시 물었다. "왜 사과를 존중해야 하지?"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사과조차도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없고 존중할 수 없는데 그보다 더 복잡하고 커다란 가치를 어떻게 알아보고 존중할 수 있겠어?"

세잔은 그것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세잔에 대하여 내가 좋아하는 또다른 말. "잘 그리기만 한 사과는 군침을 돌게 할 뿐이지만, 세잔의 사과는 마음에 말을 건넨다." 모리스 드니가 한 말이다.

그리고 반 고흐가 있었다.


Van Gogh


Green Wheat Fields, Auvers
Girl in White
Self-Portrait


내게 가장 인상깊었던 그림은 바로 반 고흐의 초상화였다. 다른 그림에는 없었던 슬픔의 힘, 특별한 아우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의 한 외로운 화가의 자화상은 벽면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고, 나는 소파에 앉아 한없이 그 작품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게 동경의 대상이었던 이 공간은 누군가에게는 산책의 공간, 누군가에게는 놀이의 공간이었겠지만, 변함없는 사실은 이 공간이 우리의 삶과 영혼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몇 분 내내 반 고흐의 자화상을 응시하던 그 순간을, 나는 아마 잊지 못할 것 같다.


끝으로, 짧고도 길었던 미국의 첫 자유여행을 함께 해준 나의 동행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어쩌면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조금 외롭고, 쓸쓸했을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같은 공간에서 벅찬 감정을 함께 나누며, 오롯이 행복할 수 있었다.


언젠가, 빠른 시일 내에, 반 고흐의 두 눈을 바라보러 다시금 국립 미술관에 갈 날을 고대하며,


2018년 8월,

몽상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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