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면 항상 생각나는 공간이 있다. 내 모든 취향의 시발점, 모든 것의 고향인 이모의 방이다. 엄마의 여섯살 터울 동생인 우리 이모는 나를 어릴 적부터 끔찍이 챙겼다. 좋은 곳,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나를 항상 데려갔고, 어린 내가 뭘 안다고 열심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이모의 방에서 나는 해리포터 책을 뒤적여보고 문구류 편력에 힘을 실으며, 그가 보던 CSI 수사물을 옆에서 훔쳐보고 셜록 홈즈에 같이 빠지기도 했다. 외가에서 길러진 터라 같이 산 세월이 제법 되고, 친구들과 모여 글쓰기를 배우기도 했기에 이모는 갈수록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었다. 열세 살에 이모가 결혼하던 즈음, 나는 이모를 괜히 뺏기는 것 같아 남몰래 섭섭해하기도 했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그의 박사논문 준비를 지켜보고 초록을 번역해주며 국문과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었다. 이모는 모르겠지만 사실 내가 그에게서 닮아온 취향은 한 가지가 더 있다. 그 작던 방에서 더 작은 손으로 열심히 넘겨보던 미술관 도록들, 회화에 대한 책들. 벽에 걸린 액자에는 고흐의 그림들이 있었고 나는 구석구석까지 외울 정도로 열심히 바라보았다. 꾸덕한 유화를 동경하며 데생을 배우던 초등학생 두부는 프랑스, 그 중에서도 모네의 고향 지베르니를 그렇게도 가고 싶어했다. 아직 프랑스는 가지 못했지만, 여행에서 나는 몇 가지 작품들을 실제로 마주하는 행운을 누렸다.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작품들 앞에서 나는 다시 일곱살이었고,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예상치 못한 압도감, 세잔
내가 본 세잔의 작품들은 주로 정물화와 풍경화였다. 별다른 꾸밈이나 정교함을 갖추지 않고 크기에서 오는 압도감도 없다. 그저 적당한 크기로 적당한 사물들과 적당한 풍경들을 그려낸다. 특유의 초록색과 노란빛을 많이 사용하는데, 채도가 낮은 편이라 살짝 탁해보이기도 해 색감이 화려한 것도 아니다. 왠지 무심했을 것 같은 붓터치들로 구성되어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의 존재감은 회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엄청나다. 그 공간에 세잔의 그림 한 점만 있어도 눈은 계속 그곳으로 향한다. 결국 그 앞에 십분이고 이십분이고 서있게 되는데, 언뜻 비슷해보이는 수많은 정물들 앞에서 나는 그 행동을 반복했다. 사과 몇 알, 하얗고 풀을 먹인 듯한 식탁보, 어두운 색 테이블 등. 정물에 등장하는 소재는 거의 동일하다. 풀과 숲으로 가득한 황토색 길 위에 네모난 건물 몇 개. 풍경화에 등장하는 소재 또한 그렇다. 그럼에도 휘어잡는 이 힘을, 나는 설명을 할 수가 없다. 나를 너무나도 압도해버리는 그의 그림은 워싱턴에서 보스턴, 뉴욕을 거치는 동안 계속 따라다녔고, 반가워하던 나는 종국에 살짝 두렵기까지 했다. 앞서 내가 무심했을 것 같다고 말한 그의 터치들은 읽을수록 정성들인 최선의 한 터치로 생각되고, 결국 나는 그 공들임에 또다시 반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할 수밖에, 터너
가장 사랑하는 작가를 모네나 고흐로 꼽곤 했던 때가 있었다. 누굴 좋아하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어서 대던 이름들이다. 그 취향은 실제로 그림을 조금씩 보러 다니면서 좁혀져, 몇년 전 서울 한가람미술관에서의 인상파 전시 이후로 보고 확고해졌다. 내가 주로 앞에 오래오래 서 있게 되는 작품은 외젠 부댕과 윌리엄 터너의 것들이었다. 이 취향은 몇년동안 바뀌지 않았고, 이번 여행에서는 또다시 확인하고 확신하게 되었었다. 부댕의 그림들은 생각보다 많이 만나지 못했지만, 영국 작가 터너의 그림은 매 미술관마다 적어도 두 개 이상은 만났던 것 같다. 그의 그림은 주로 풍경을 다루고 그 중에서 바다나 강가를 그린 작품들이 많다. 나의 생각으로 터너의 그림은 두 번에 걸쳐서 사람을 매료시킨다. 첫째로는 그림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눈길을 끈다. 그의 하늘 표현이나 물결 질감 표현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자연에서만 가능할 것 같은 빛의 그라데이션을 정교하고 아름답게 그려낸다. 강렬한 색을 마구 쓰지 않으면서도 표현해낸 너무나 예쁜 색감과 질감에 나는 정신을 하나도 차리지 못했다. 둘째로는 생각외의 제목에 놀란다. 너무나도 아름답지만 알고보니 화재현장을 그린 그림, 타는 석양의 미감(美感)을 표현한 줄 알았는데 제목은 전혀 다른 내용인 그림 등.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예술작품’이라면 어떤 장면을 어떻게 포착하고, 어떤 내용을 전달할지 결정하는 단계를 꼭 거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터너의 이러한 작업이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허를 찌르는, 고흐
고흐는 원래 워낙 유명하고, 내가 간 미술관마다 그의 그림을 시그니처로 내세우고 있었다. 물론 모네도 마찬가지.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는 그의 자화상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는 <별이 빛나는 밤에>을, 보스턴미술관에서도 다수의 그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이모의 방에 걸려있던 그림 중에 <별이 빛나는 밤>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가장 유명한 그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당연히 먼저 자연스럽게 눈이 갔다. 그림 앞에는 작품을 담기 위한 사람들이 말 그대로 ‘바글바글’했고, 나도 그 중에 섞여 있다가 고개를 돌렸었다. 그때 마주해 더욱 오랫동안 바라본 그의 올리브나무 그림이 있다. 이전에 갔던 미술관들에도 올리브나무를 그린 그림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는 잔잔하고 어두운 색감을 가진 이 그림 앞에서 또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휘몰아치는 듯한 그의 특유의 화풍으로 표현된 나무들은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리며 움직이는 듯하다. 크게 유명하지 않은 그림들이지만(일반 대중의 시선에서 말이다), 모두 고흐의 힘을 그대로 담고 있는 그림들이다.
너무 전문적인 영역이기도 하고, 그저 오랫동안 동경해온 그림들을 마주함에 대한 설렘이 커서 선뜻 써지지는 않았다. 조금 편안하게, 내가 느낀 감상들을 풀어내고 싶었는데, 잘 됐는지는 모르겠다. 동부 여행을 시작하고 워싱턴의 내셔널 갤러리를 돌아볼 때 당시 연락하던 친구에게 이렇게 예쁜 것만 보고 살고 싶다, 라고 말했었다. 예쁘다 라는 말로 표현하면 너무 단순하지만, 그래도 그들에게 내 수준에서 보낼 수 있는 가장 직관적인 찬사였다. 우리 모두 좋아하는 것, 예쁜 것만 보고 살았으면. 그리고 그 예쁨의 소중함을 더 잘 느끼고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서늘한 바닷바람을 뒤로 하고,
방학동 반지하방을 그리며
두부 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