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대, 영화라는 매체를 사랑한다. 풋내기 고등학생 시절 동경하던 영화평론가를 인터뷰한 이래로, 영화는 내 각별한 애정의 대상이었다. 대학생이 된 이후로는 차곡차곡 쌓아둔 영화 목록을 도장깨기하는 것이 취미가 되었으며, 광화문 씨네큐브와 아트하우스 모모는 가장 자주 방문하는 공간들 중 하나가 되었다. 3년 째 헤비 왓챠 유저로 활동 중이며 이동진 평론가와 김혜리 기자는 내가 가장 자주 찾는 작가들이 되었다. 물론 다른 씨네 키즈에 비할 바 없는 이력이지만, 그렇더라도 영화가 내 삶에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나의 영화 취향은 무엇인가. 아마도 내가 좋아하는 영화 감독들을 나열한다면 나의 취향에 대한 어떤 단서를 제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다미안 차젤레, 리차드 링클레이터, 미셸 공드리, 박찬욱, 봉준호, 스파이크 존스, 우디 앨런, 자비에 돌란, 짐 자무쉬, 토드 헤인즈, 쿠엔틴 타란티노... 내 소중한 기억의 일부가 되어준 영화들을 만든 사람들이다. 돌이켜보면 이들의 영화에 대한 경험이 단순히 '보기'에서 그친 적은 거의 없었다. 영화관을 나선 뒤에는 언제나 영화에 대한 평론 및 기사를 읽거나, 나름의 감상을 작성하거나, 시네마톡 혹은 GV를 감상하며 늘 그 여운을 좇고, 재생하고, 덧칠했다. 말하자면 나는 영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즐기는 데서 진득한 재미를 느끼는, 끈질긴 향유자인 것이다.
그런데 나는 최근, 이 소중한 영화들을 향유할 새로운 방식을 발견했다. 그것은 하나의 반짝이는 깨달음으로부터 발견한 것인데, 앞서 언급한 대부분의 감독의 영화 포스터들이 같은 제작사에서 제작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바로 4명의 디자이너로 구성된 디자인 스튜디오, 피그말리온(Pygmalion)이다.
피그말리온은 2011년에 창립한 이후 매년 40편 이상의 포스터를 제작하고 있는 디자인 스튜디오다. 영화 포스터 제작을 주로 하며, 뮤지컬, 드라마, 음반 커버 등의 포스터 제작도 하고 있다. 2014년에는 영화 <마미>의 감독 자비에 돌란이 직접 인스타그램에 피그말리온이 제작한 포스터를 올리며,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마미> 포스터'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피그말리온은 자비에 돌란의 최근작 <단지 세상의 끝>의 미국 어워드 시즌용 프로모션 디자인을 맡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내게는 피그말리온의 포스터들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필수 불가결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내가 애정하는 영화들의 포스터 대부분이 이들의 손길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영화에 일차적인 인상을 부여하는 것은 다름아닌 포스터다. <마미>를 답답하고 깜깜한 현실의 문을 열어젖히는 한 소년이 품은 자유의 총천연색 빛깔로 기억하고, <캐롤>을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의 따뜻하게 반짝이는 눈빛으로 기억하는 것에는 포스터가 팔할 정도 기여했을 것이다. 그만큼 피그말리온은 영화가 품은 감성과 빛깔, 그리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를 명확하게 캐치한다. 그리고 특유의 사려깊은 시선으로 영화를 한 폭의 그림 안에 담아낸다.
피그말리온은 블록버스터와 같은 상업 영화부터 다양성 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 포스터들을 제작한다. 그러나 외국 상업 영화의 경우 공식 포스터를 국내용으로 재편하는 경우가 많다. 다미안 차젤레의 <라라랜드>,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 스파이크 존스의 <그녀> 등이 이런 경우에 속한다. 때문에 피그말리온이 제작한 영화 포스터들 중 흥행한 상당수는 다양성 영화 혹은 재개봉 영화들이었다. 피그말리온만의 개성과 색채가 비교적 더 부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를 상업 영화와 다양성 영화, 혹은 예술 영화로 나누는 것도 어쩌면 의미 없는 경계 나누기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영화 포스터를 제작할 때 컷 셀렉(Cut Select)을 가장 중시한다는 피그말리온답게, 그들의 포스터에는 영화의 가장 빛나는 풍경이 담겨 있다. <이터널 선샤인>을 본 관객이라면 두 연인이 몬트리올의 눈밭에서 뒹굴며 웃던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사랑하던 두 사람이 결코 잊고 싶지 않아했던, 사랑의 수맥과도 같은 장면이었기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본 관객이라면 조제를 업고 거닐던 츠네오의 모습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유통기한이 정해진 현실 속 사랑의 아릿함을 그대로 품은 이미지 그 자체이기에.
앞서 언급한 영화들은 대부분 내 삶의 일부를 이루어 준 소중한 작품들이다. 이 영화들을 향유함에 있어 나는 이제 제3의 방식을 취하곤 한다. 바로 영화와의 첫 만남으로 돌아가는 것. 두 시간 동안 영화를 겪어내고 조금 시간을 묵혀둔 후에, 내가 내가 처음으로 바라보았던 영화의 얼굴을 다시금 바라보는 것. 그럼으로써 나는 영화에 대한 나의 수많은 생각들을 하나의 이미지 속에 압축하여 저장하거나, 영화를 보고 느꼈던 짙은 여운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이 과정이 가능했던 것은 물론 내가 영화들 뿐 아니라 이들의 포스터까지 사랑했기 때문이다. 깊은 애정과 사려깊은 시선으로 만들어진, 피그말리온의 포스터들을 말이다.
그러니 부디, 여러분. 영화를 보고 느꼈던 진한 감정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면, 자신에게 소중했던 영화를 손에 꼽아보고 싶다면, 가끔은 영화와의 첫 만남으로 돌아가 보시길. 생각보다 큰 행복감을 누릴 수 있을 테니. 영화 포스터에 대한 강력한 소장 욕구는 덤. 예쁜 건 갖고 싶으니까!
*해당 포스팅에 사용된 모든 사진의 출처는 피그말리온 공식 홈페이지(https://pygmn.com)입니다.
*해당 포스팅에서 제공된 피그말리온에 대한 정보 일부는 디자인정글 매거진 인터뷰(http://magazine.jungle.co.kr/cat_magazine_special/detail_view.asp?master_idx=17156&pagenum=1&temptype=5&page=1&code=&menu_idx=138&main_menu_idx=5&sub_menu_idx=25&all_flag=1)에서 참고했습니다.
몽상 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