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꼬리에 심상찮은 색이 비쳐 보니 코피가 터져 베갯잇이 엉망이었다. 요 며칠 잠 줄여가며 요령 없이 일하다가 몸에 무리가 된 모양이다. 얼마 전에 세탁했는데 또 수고스러워졌다는 건 생각도 못 하고 묘한 만족감이 들었다. 연말을 맞아 이런저런 상념들로 속이 시끄러운 와중에 그래도 뭔가를 하면서 살고 있긴 하다는 걸 내 몸이 증명해 주는 듯해 그랬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는 여러 형태의 문구들이 전 세계인에게 영감을 주고 있지만 스쳐 지나가는 감정 하나에도 이유를 찾아 따지는 내가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하는 건 참 쉽지가 않다. 며칠 내내 널어 놓은 빨래도 못 갤 정도로 바빴으면서 코피가 나야만 노력을 인정해 주고 있으니 말 다 했다. 임용고시를 접고 나서 불안감을 이겨보려 하루도 제대로 쉬지 않고 뭐든 해왔지만 여전히 성공보다 실패가 많은 내 짧은 인생에 불만이 많다.
누구나 인생의 속도가 다르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런 이치와 원리 속에서도 난 늘 앞서가야만 한다는 강박을 벗지 못했다. 남들보다 잘 해야 한다는 자의식 과잉이 그래도 지금 정도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가끔은 나도 '이 정도면 됐지'하며 낙관적으로 살고 싶다.
친절하지 않은 사람은 게으른 것이라 비난했다. 힘을 밖으로 쓰지 않고 아껴 누구를 굳이 헤아리지 않고 말하고 행동하는 게 인색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늘은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고 추웠다. 온몸에 힘을 주고 버티고 있는데 버스 도착시간을 가리고 있었는지 누가 내 어깨를 밀었다. 평소라면 무던히 넘어갔을 일에 오늘은 속에서 짜증이 울컥거렸다. 왜 남의 몸에 손을 대느냐고 따져볼까, 하다가 순간 아침에 흘린 코피가 떠올라 그만두었다. 친절은 에너지 소비가 크다. 오늘 하루 동안 쓸 힘이 바닥나 마음이 굶주려버렸구나, 하고 내가 나를 달랬다. 한동안 마음이 불러서 고플 때의 내 모습을 그새 잊어버렸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