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무 주책 맞게 울지 않기를
제목을 한 글자씩 발음하기만 해도 눈꼬리가 묵직해진다. 어렸을 때 아끼던 눈물이 요즘 들어 부쩍 주책 맞게 많아졌다. T의 결혼식이 2주도 남지 않았다. 그 어떤 결혼식보다 많은 감정이입을 하고 말 것만 같다.
태어나서부터 함께한
하나뿐인 오빠의
결혼식이니까
한 살 터울의 T와 나를 길러내느라 부모님은 많이 힘드셨다고 한다. 내가 태어났을 때 T는 고작 16개월의 말도 떼지 못한 아기였다. 엄마가 병원에서 나를 데리고 와 방에 뉘어놓으니 호기심 가득한 까만 눈으로 방 문 앞을 서성댔다는 T는 다른 형 누나들처럼 엄마 몰래 동생을 괴롭히기는커녕 엄마에게 혼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내 동생 때리지 마!"를 외쳤던 희대의 동생바보였다. 어렸을 때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는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어른들의 농담에 그동안 감사했다며 짐을 싸서 나가려고 했다는 순둥이. (반면 나는 "웃기지 마세요 내가 이렇게 엄마 아빠를 닮았는데" 라며 코웃음을 친 되바라진 아이였다.)
그렇게 천성이 순했던 T는 그러나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받는 불이익이 쌓여가며 동생의 존재를 서서히 다르게 인식한 것 같다. 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친구와 노는 곳에 내가 얼쩡거리는 것을 싫어했고 밖에서는 아예 눈도 마주 치치 않으며 내외하는 현실 오빠로 자라났다.
우리의 학창 시절은 늘 함께하면서도 (한 살 차이라 학교가 거의 같았으므로) 멀리하는 사이였고 얼굴도 그다지 닮지 않아 돌림자를 쓰는 우리의 이름을 모르는 이상 남매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학교에서 크게 괴롭힘을 당할 때나 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최대 고민이 있을 때 T는 내 말을 (안 듣는 척) 들어주고는 무심하게 한 마디씩을 던지고는 했다. 그 조언에서 죽도록 고민하던 문제를 다시 마주하기 위해 필요한 힘을 얻은것도 사실이다. T에게 나는 '늘 혼자서도 잘 하는 동생'이었지만 돌아보면,,
T가 있었기 때문에
겁 없이 혼자 해 본
많은 것들이 있었음을
지금은 안다
과거의 나는 T와 내 사이가 데면데면한 것에 늘 불만이 있었다. 함께 자취하는 동안 집안일을 도와주지 않아 많이 싸우기도 했는데, 이때 우리 사이의 거리가 극도로 벌어졌다. 오빠가 있으니 좋겠다는 친구에게 "오빠는 너나 갖고 나는 언니도 필요 없으니 외동이면 좋겠다"라고 말할 때 나는 분명 진심이었다. 나중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T는 부모님과의 전화 통화 서두에 늘 "OO는?"하고 습관처럼 내 안부를 묻는다고 한다. 내가 없는 곳에서만 챙기니 알 길이 없을 뿐.
한 살 터울의 오빠라는 존재는 어린 내 눈에 늘 부족해 보였고, 있으나마나 할 때도 많았으며 한바탕 부모님 속을 썩일 때는 한심해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T가 다른 남자아이들에 비해 크게 말썽을 피운 것도 아니었다. 성적은 항상 나보다 높았고 외모도 훤칠하여 엄마의 자랑이었다. 그럼에도 엄격한 우리 집안의 잣대에 늘 평가절하 되었고 첫째라는, 그리고 여동생을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시달려야 했다. 지금에 와서 내가 가장 미안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내 눈에 T가 한심해 보이던 그때, 나 역시도 한없이 모자란 그릇밖에 되지 못했기 때문에 담아내지 못했음을 많은 시간이 지나 어렵게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런 T가, 가족과 떨어져 해외에서 혼자 생활한 지 십 년 만에 마음을 보듬어줄 누군가를 만나 결혼을 한다. 아래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이라 하여 처음에는 조금 미심쩍은 마음이었지만, 나이 많은 나보다 훨씬 더 넓게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이어서 반대할 이유가 (사실은 자격도) 없었다.
내가 보듬어주지
못한 마음이었기 때문에
더 무겁게 감사한 일이다
고맙다는 말이, 미안하다는 말이, 잘 할 거라는 말이, 그리고 잘 하고 있다는 말이, 속에서 너무 많이 돌고돌아 서로 부딪히고 흩어져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느낌이다. 어렸을 때 부족해 보이던 것이 신기할 정도로 나는 이제 T가 내리는 결정에 '그럴만한 기준이 있겠지', '어련히 잘 판단했겠지'하며 무한 신뢰하는 편이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잘난 오빠였지만 절대 나에게서 뺏지 못하는 가족이라는 사실에 당연시했던 과거를 여기서 청산하며 T가 우리 가족에게 안겨 준 행복만큼, 그리고 그보다 더 행복하길 바란다. 왠지 결혼식에서 형제가 너무 많이 울면 안 된다는 어른들의 타박을 들을 것만 같아 불안하다.
T가 우리의 자상했던
아버지만큼이나 큰 사랑으로
가족을 보듬을 거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태어나면서부터 늘 T와 붙어있던 시간이 갑작스럽게 끝난 것은 24년 만의 일이었다. 대학 졸업 후 나는 한국의 부모님에게로, T는 우리가 대학을 다니던 그곳에 남게 되었다. 많아야 일 년에 한 번 볼 수 있게 되면서 부모님을 통해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것 외에 근황을 알 기회가 없어지자 나는 외국에 나갈 때마다 T에게 현지 엽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해외에 잘 나가지 않는 T에게 자극이 되어 더 많을 것을 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지만 이제는 떠도는 내 마음이 편하고자 보낸다. 별 내용 없이, 그 순간의 감흥을 담아서. 여행을 할 때마다 T에게 보낼 엽서를 고르는 것은 이제 그 나름의 재미가 있다. 잘 모으고 있지?
오빠가 결혼한다고
그만 둘 생각은 없으니
앞으로도 잘 부탁해
결혼, 축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