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2_A가 남긴 기억

그리고 시원시원한 미소

by 일랑



A를 만난 건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낯선 도시에서의
대학원 시절이었다


나와 A의 나이 차이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열 살 가까이였던 것 같다. A는 똑똑했고, 털털하면서도 겸손한 친구였다. 나에게도,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사랑받는 밝음이 있어 순수함으로 따지자면 오히려 동생 같았던 그녀. 훤칠하게 긴 팔다리로 자신을 닮은 자전거를 타고 나타나던 에너지 가득한 A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훤칠한 그녀의 씩씩한 뒷모습

나는 A와 여행을 함께 하기도 하고, 밤새워 과제를 함께 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빗대어 가르치려 들지 않았고 자신의 기준을 강요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종교마저도) 하지만 나와 다른 친구의 불화가 있을 때 나를 진정시키며 생각지 못한 부분을 짚어줄 때는 역시 언니인가 보다고 느끼기도 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아주 긴 시간을 함께 하지도 않았고 각자의 여건이 너무나도 달랐기에 깊은 공감을 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다름이 나에게 놀라움으로 다가올 때가 있었다. 한 번은 그녀가 의외의 말을 꺼낸 적이 있다. 나는 못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요즘 나를 진심으로 대하지 못했었다고. 최근 내가 받은 취직 제안에 조금 질투가 났었다고. 왜인지 털어놓고 싶었고, 말함으로써 털어내고 싶었다며.


다 같이 예민한 시기에
나는 같은 무게를 짊어진
친구들에게 세심하지 못했다
오히려 내 잘못이었다


나도 질투를 한다. 심지어 많이 한다. 하지만 A처럼 사실대로 털어놓을 용기는 아직도 없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녀는 대인배였다. 오히려 반성해야 할 쪽은 나였는데 말이다. 졸업과 취업이라는 같은 고민에 직면한 친구들 앞에서 먼저 제안을 받은 나는 조금 우쭐했을 것이다. 사실 그 제안이 대단히 매력적인 것도 아니었어서 결과적으로 거절한 꼴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가 될 거라는 것을 한 번만 더 생각해 봤어야 했다. 내 그릇의 크기는 딱 그만큼이었다.

A와의 북유럽 여행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하던 친구들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A와는 졸업 이후, 그녀가 사는 도시로 간 여행에서 저녁을 함께한 게 전부다. 그녀가 나보다 어린 남자 친구와의 결혼 소식을 알려왔을 때, 나는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었다.


나는 그를 잘 모르지만
네가 선택한 사람이라면
분명 좋은 사람일 거라는
확신이 들어


A라면, 나이를 초월해서 더 중요한 가치를 상대에게서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오는 난관도 지혜롭게 헤쳐나갈 것이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그녀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녀는 얼마 전까지 남편의 가족과 함께 남미에서 살았다. 최근 중국으로 건너가 새롭게 시작했다는 말을 다른 친구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간간히 SNS로 존재를 알리는 그녀가 지금 행복한지 그렇지 못한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바라건대, A만큼 진심을 다해 사는 사람은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 그래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희망이 있다.


시간이 흘러, 내가 그 시절 A의 나이가 되고 보니 꼰대 티를 내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느낀다. 걸핏하면 가르치려 들게 되고 마치 내 생각이 만고의 진리인 양 떠드는 건 A처럼 모든 것을 열린 마음으로 초심에서 바라보는 일 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다.


아직, 그 미소는 여전한지 궁금하다

A의 사진을 찾기 위해 지난 사진첩을 뒤척이는데, 나도 모르게 점점 손이 느려진다. 카메라를 보고 활짝 웃는 모습이 유독 많은 A였다. 그 미소가 유독 시원시원하고 예쁜 그녀였다.


나를 보던 얼굴에
웃음을 가득 실어주던
그 모습 그대로 기억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