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려운 걸 해내는 너
실기 면접을 보러 간 그날
미래의 사무실에서
미래의 동기 E를 만났다
인생에서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력서에 올리는 첫 회사의 면접이었다. 당시 인턴으로 일하고 있던 두 살 아래의 E는 아직 학생티를 벗지 못한 앳된 모습이었다. 연한 핑크색 맨투맨 티셔츠에 만두처럼 말아 올린 머리가 귀여우면서도 야근이나 사무실 같은 어른들의 공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생명체'였다고 그녀를 회상한다. 회사이기 때문에 호칭도 어색했는데, 선배도 아니었고 직급도 없는 나를 '~씨'라고 차마 부르지 못하던 E는 다른 선배들의 눈치를 보다 결국 '언니'라고 정리해버렸다. 심지어 팀장 보고를 할 때도 나를 언니라고 하는 통에 부끄러움은 내 몫이었다. 동생이 없는 나는 나보다 한 살이라도 어린 존재들에게 마냥 해주는 버릇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늘 E에게도 참 약했다.
내 입사에 맞추어 그녀도 정규직이 되었다. 그 후 우리는 혹독한 시간을 겪었다. 가장 비슷한 처지였던 E와 나는 거의 같은 수순의 변화를 겪었는데 그 과정에서 사교성 좋은 E는 몰아치는 비바람에도 유연하게 적응해 나갔다. 마음에 안 드는 선배에게도 티 내지 않았고 회사의 부당한 처사에도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에 반해 나는 회사의 변덕에 이리저리 휘둘리기를 거부했고, 미약하게나마 내 힘으로 물길을 틀어보고자 발악했다. 잠시 탈출했나 싶다 가다도 정신 차려보면 다시 제자리라는 사실에 좌절하기를 반복했다.
같은 여건인데도
누군가는 괴로움에 몸부림쳤고
누군가는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신기했다
E는 나 만큼 해외 경험이 많았지만 특유의 앳됨이 상사들로 하여금 과중한 책임을 줄 수 없게 했던지 매번 내 차지가 되었다. 크게 상관은 없었다. 나는 나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자존감을 높인다면 E는 사랑받는 분위기에서 자존감을 느꼈다. 같은 일을 하는 같은 연차의 막내였지만 확연히 다른 우리 둘은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해가며 팀 막내로서의 자리를 나름 잘 꾸려나갔다고 생각한다.
회사생활 초반에 E가 보여준 모습은, 천둥벌거숭이처럼 곱게만 자라 안면 없는 협력사 담당에게는 전화하기도 꺼려하는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내가 다른 사무실로 얼마간 파견을 가게 되고, 오랜만에 돌아와 다시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을 때, 그녀의 통화소리에 놀라 한동안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전에 없던 논리와 단호함이 있었다. 나에게는 변화 없이 지루하게 흘러갔던 몇 년의 회사생활이었지만 그녀를 보고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변했다는 걸
그것도 아주 많이
저연차 시절 그녀가 몇 번 티 나게 지각을 한 적이 있다. 제대로 늦은 적만 꼽자면 몇 번이었던 것이고 평소에도 보는 사람이 다 마음 졸일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출근하는 편이었다. 내 주변에 습관적으로 지각을 하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나는, 그게 E의 천성이라고 생각했고 고칠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E는 이 버릇을 고치다 못해 아예 새벽같이 출근해서 운동을 하고 사무실로 올라오는 새로운 패턴으로 살기 시작했다. 몸에 베인 습관을 고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누구보다 잘 아는 나는 E의 이런 성과를 진심으로 높이 산다. 동생이면서도 경외심이 생길 정도였다. 아니 그걸 다 떠나서, 인간의 습성을 거스르는 인류의 업적이라 칭송할 정도로 감동을 받았더랬다. 나는 그녀를 만날 때 아직까지도 이 이야기를 종종 꺼낸다.
그러던 E가 어느 순간부터 회사 이외의 일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불안했다. 모든 것이 불만인 이 회사에 E마저도 사라진다면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전부터 알아보던 이직을 더 간절한 마음으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적당한 기회를 잡아 지금의 회사로 옮기게 되었다. E은 지금도 여전히 그 회사에 다닌다. 농담처럼 어느 정도의 진심을 담아하는 말이지만, E가 날 이직시켜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은 회사에서 그나마 원래의 내가 한 조각이라도 남아있을 수 있었던 건 분명 E덕분이리라.
회사를 떠난 지금도 간간히 E를 만난다. 회사 밖 그녀는 여전히 사랑스럽고 애교 넘치는 모습이다. 내게는 여전히 스물다섯 핑크색 맨투맨을 입고 있던 만두머리의 소녀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이제는 막내자리를 내어주고 어엿한 선임이 되었(을것이)다. 이직하고 난 뒤 내가 성격도 밝아지고 얼굴도 좋아 보인다고 툴툴대는 녀석. 힘든 상황을 같이 겪으며 의지가 되어준 E를 보면서, 똑 부러지게 내 할 말을 하는 것만이 강함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흔드는 대로 흔들려 주는 것,
분명 나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