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지 않은 23년을 되짚어보며
어린 시절 친분은 부모님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곤 한다. 예를 들면, 어머니들끼리 친해서 자주 만나게 되면서 자녀들의 과외팀이 꾸려진다던지 하는 케이스가 되겠다. 바로 나의 경우처럼.
남자아이 셋과 여자아이 둘,
초등학교 3학년 같은 반으로 만나
온갖 과외를 함께한 친구들 중에
나와 C가 있었다
영어, 한문, 글짓기, 미술, 수학, 속독을 함께하며 공동체 의식마저 생겨버린 이 다섯은 최근에도 이 중 둘이 (서로가 아니라 각각 다른 상대와) 결혼을 하면서 몇 차례 연속으로 만나게 되었다. 우리 다섯이 초등학생 시절부터 쉬지 않고 꾸준히 만나온 것은 아니다. 각자의 사정으로 한둘이 참석 못하기도 하고 아예 한동안 못 본 친구도 있다. 하지만 20년 넘은 친구가 세상에 흔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매번 다시 뭉치는데 이견은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10년, 15년, 20년 만에 만나는 모든 자리에서 늘 처음 만난 어린 시절의 똑같은 기억을 반복해서 끄집어낸다는 거다. 그리고 매번 처음 하는 이야기처럼 즐거워한다. 다음에 만나면 아마 또 이 이야기를 할 거라는 누군가의 예언에 다시 와하하 웃음이 터진다. 이 친구들을 만나면 (심히 진부한 표현이지만) 다시 초등학생이 된 기분이다.
그중 내가 유독 C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이유는 생각이나 취향이 비슷해서 인 것 같다. 어린 시절 C와 나는 다섯 명 사이에서 가장 많이 싸웠다. 지는 것을 싫어하는 우리는 과외에서 만나면 으르렁대며 불꽃같이 경쟁했다. 지고 온 날은 속상한 마음에 C가 제일 싫다며 엄마를 붙잡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나중에 들으니 C도 그랬다더라.
2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비슷해서 더 부딪혔다는 것을
C의 어머니는 멋쟁이 셔서, 그 영향으로 어린 시절 C는 마치 부잣집 도련님 같은 이미지였다. 똑 닮은 두 살 터울 남동생과 다니면 그 부티는 두배가 되었다. 딸이 없던 C의 어머니에게 나는 귀여움을 받았고, 형이 없던 C는 우리 오빠를 잘 따랐다. C가 다른 동네의 중학교로 진학을 하고, 내가 멀리 이사 가면서 어떻게 지낸다는 간략한 소식만 어른들끼리 간간히 주고받으셨다. 스무 살이 되어서야 우리끼리 연락해서 만나기 시작했는데 그나마도 몇 년에 한 번 큰 맘을 먹어야 볼 수 있었다. 막상 만나면 너무 반갑고 좋으니 일 년에 한 번은 꼭 보자 하다가도 돌아서면 어떤 계기 없이는 만나자는 말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사이. 그래도 결혼같이 인생의 큰 변화를 앞두고는 보고 싶어 지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친구 둘을 시집 장가보내고, C와 둘이 만날 자리가 있었다. 어찌나 쉼 없이 떠들었던지 나올 때쯤에 나는 목이 쉬어있었다. 어릴 때처럼 조잘대는 내가 재미있다며 C도 참 많이 웃었더랬다. 유난히도 서글서글한 눈매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변함없는 C의 모습에 안심하다가도, 언 듯 의외의 모습을 발견한다.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꿰뚫어 볼 수 없는 무언가가 생겼다. 세상의 쓴 맛을 본 어른처럼 말이다. 20년도 더 된 친구의 조금 낯선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햇수로는 오래되었대도
초등학교 졸업 이후 지금까지
만난 횟수는 열 번 남짓인 거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C는 20년을 살아온 거다. 내 앞에서 마냥 천진하게 웃고 있어도 어딘가에서는 어른으로써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 거란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모습에 열 살짜리 어린아이의 작은 어깨가 겹쳐져 자꾸만 짠해진다. 내 친구는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싫은 소리 들을 일도 돈 걱정할 일도 고생할 일도 없었으면 좋겠는 거다. 아, 그런 건 차마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거다.
만날 때마다 그 옛날의 기억을 계속해서 꺼내는 건 우리가 공유한 시간이 그때뿐이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그때와 지금, 그 중간에 존재하는 시간은 합쳐봐야 고작 며칠밖에 안되니까. 그러니 손에 쥐어진 유일한 기억인 그때의 모습만을 서로에게서 계속 찾게 되는 거다. 어쩌면 기억에 갇혀 현재의 우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걸 수도 있겠다. 다 커버린 서로가 너무 낯설어서, 내가 기억하는 너로 남아주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지나쳐 무의식 중에 못 본 척하게 되는 그런 것 말이다.
스무 살이 된 친구들이 다시 모여 한바탕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누가 말했다. 모두 결혼하고 나서도 이렇게 계속 보게 되겠지, 하고. 우리 같은 친구가 어디 흔하냐며. 그때, 아무래도 그건 좀 어렵지 않을까 하며 C가 말했다. 어릴 때 친구라도 이성이라면 너무 격 없이 어울리는 게 배우자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다던 스무 살의 C. 조용히 같은 생각을 하던 중인 나는, 동질감에 웃어야 할지 몇 년 후면 못 볼 인연에 서운해야 할지 몰라 애매모호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나처럼 생각 많고 솔직한 너라서
비슷하게 뻣뻣한 너라서
그래서 더 애틋한가 보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