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5_조용히 끌어주던 S

덕분에 지나온 시간

by 일랑



만약 그때 S가 없었다면
나는 그 시간을
어떻게 헤쳐갔을까


S에게 '우리 언니'라고 부르지 않은 이유는 단지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이다. 우리는 만남과 동시에 고된 시간을 함께해야 했기 때문에 초면부터 서로를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의지하는 것과 부담 주는 것은 한 끗 차이였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고백하건대, 내가 그녀를 '언니'하고 부를 때는 그 앞에 늘 '우리'가 붙어있었다. 만약 그 시절, 그 상황에 나 혼자 던져졌다면 어땠을까. 어떻게든 겪어내긴 했겠지만 무던히도 힘들었을 것이다.


당시 상황을 간단히 그려보자면 이렇다. S와 나는 같은 학교에 합격한 예비 대학원생이었다. 인터넷으로 만나 학교 근처에서 집을 함께 쓰기로 약속한 사이였다. 하지만 그 집은 개강 후 몇 주 동안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당분간 임시숙소에서 지내기로 했다. 도착하고 보니 그 임시숙소라고 생각한 곳에는 머무르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S와 나는 하루아침에 오갈데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개강은 했으니 수업은 받아야 해서 몸은 강의실에 앉아있었지만 정신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아간 지 오래였다. 수업이 끝나면 짐을 끌고 어디로 가야 하는 건지 막막했다. 하지만 S는 특유의 침착함으로 상황을 대처해 나갔다. 마침내 우리가 계획했던 집에 짐을 옮기던 날은 실로 감동적이었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여기에 S와 나의 애물단지같은 자취방이 있었다

S는 요란하게 스스로를 어필하는 적극적인 캐릭터는 아니었다. 하지만 요리를 좋아하는 그녀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모였다. 대학생 시절 이미 자취를 해 본 그녀의 솜씨는 수준급이었다. 대학 내내 자취를 했어도 생존을 위해서만 가스불을 켜는 나와는 노선부터 다른 그녀가 나는 마냥 신기했다. 당시 학교에 S와 같은 나이의 언니들이 여럿 있었음에도 내가 의지한 대상이 S 뿐이었다는 사실은 비단 그녀와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가 자주 해주던 맛있는 것들 때문만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여동생이 있기 때문인지 S는 나를 자연스럽게 리드했다. 대청소하는 날, 장을 보는 날(여행용 캐리어에 생수를 가득 채워 끌고 오곤 했기 때문에 팀워크가 필수), 분리수거하는 날 등 때가 되면 S의 콜이 있었고 나는 따라나서기만 하면 되었다. 나는 평소 팀 활동을 리드하는 편이지만 그녀와 있는 동안만큼은 편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그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S에게는 피곤한 일이었을 수 있겠다. (언니, 그랬어?) 그렇게 언니라며 의지했던 그녀의 당시 나이는 지금 나보다 다섯 살 어렸다. 사실 서툴고 어눌하기는 그녀나 나나 매한가지 아니었을까. S는, 길 잃은 동물처럼 그녀를 바라보는 나에 대한 알 수 없는 책임감 때문에 주저 않지 않으려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것일 수도 있겠다.


차분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아 편안한 S와의 대화

S는 나를 가르치려 하거나 간섭하지 않았다. 서로 남남이던 우리가 정해진 시간 동안 한 집에서 사는데 필요한 균형을 서로 잘 지켜나갔다고 생각한다. 차분한 말투에 적절한 유머가 녹아있었지만 약간의 단호함도 있었다. 감정을 폭발적으로 분출하고 결국은 관계에서 손해 보는 나와 달리 S는 숨기지 않되, 정제된 감정을 표현했다. 나는 그녀의 그런 점을 늘 배우고 싶었다.


S는,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결혼한 그녀는 이제 더 신나게 요리하는 여자다

자꾸만 모든 이야기가 결혼과 출산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이상하지만, S의 이야기도 그렇다. 몇 년 전 동창회에서 만난 그녀는 좋은 사람과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다고 했다. 그녀의 표정과 제스처가, 분명 좋은 인연을 만난 거라는 확신을 주었다. 그녀가 설명하는 사람과 그녀는 단순한 끌림이 아니라 깊은 존중과 애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S는 그 사람과 결혼을 했고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요리하고 있다. 인생도, 미래도.


같이 디자인을 공부하던 시절, 그녀는 실무가 하고 싶다고 했고 나는 기획을 하고 싶어 했다. 졸업 후 우리는 정확히 반대의 길로 나아갔다. 세상이란, 원하는 대로 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곧 불행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나는 나대로, S는 S대로 지나온 길과 지금의 자리에 행복하다. (S에게 확실히 묻지는 않았지만 그녀도 행복할 것이라 추측한다)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 주는 것
그것 또한 나아가는
방법이라는 것을 배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