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6_이상한 남자 P와 R

그리고 그들의 케미

by 일랑



이전 회사에 다닐 때 몇 달 동안 계열사로 파견을 나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P와 R을 만났다. 둘은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P가 먹구름 낀 것처럼 암울한 아우라라면 R은 밑도 끝도 없이 (본인의 표현을 빌려) 명랑한 인물이다.


이후 나는 이 둘을 묶어
'계열사 선배들'이라고
칭하게 된다


그들은 첫날부터 나에게 관심이 많았다. 특히 R은 대놓고 호구조사를 해댔다. 오해는 말아야 할 것이, R에게는 결혼을 전제로 오래 사귄 여자 친구가 있고 P는 나보다 아주, 아주 선배이다. 훗날 R은 내 첫인상을 이렇게 평가했다. "지적인 느낌이었지, 책을 많이 읽을 것 같은. 알고 보니 아니었지만." 가끔 느끼는데, 그는 소름 끼치게 통찰력 있다. P와 R이 민망해하는 부분이자 내가 유일하게 그들을 놀릴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의 학벌이다. 둘은 명문대 출신이고 그것을 반쯤 비밀로 하며 살아간다.


P가 점심을 사면 내가 디저트를 산다

P는 위로가 많이 필요한 사람이다. 한참 선배임에도 이상하게 윗사람 같지 않은 느낌이 든다. 제2의 인생으로 편의점 알바를 꿈꾼다는 그의 말에 한참을 웃다가, 그게 또 묘하게 어울리는 사람인지라 진담인가 하여 갸우뚱거리게 된다. 함께 일해보아서 알지만 P도 똑똑한 사람이다. 다만 현대인의 상징인 피로를 지극히도, 그리고 지독히도 많이 짊어지고 있는 것일 뿐. P는 그림을 그린다. 취미생활을 한다는 것도 나와 비슷하고, 혼자 여행을 다니는 것도 비슷하다. 그는 마치 나의 아주 아주 우울한 버전 같기도 하다. 나는 한참 선배인 그를 '존경'한다기보다 '공경'하고 있는 것 같다.


잊을만하면 R에게 연락이 온다.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고 한참 투덜대다 나의 이모저모를 가지고 트집 잡는다. 거진 다 맞는 말이라 받아치기도 어렵다. 좋은 뇌세포를 이상한 데다 낭비하는 R이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놀림으로써 그의 뇌가 발달하는 것 같기도 하다. 만날 때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적과 놀림을 받고 나면 내가 이 사람을 또 왜 만났나 싶다. 하지만 언제나 먼저 연락하는 쪽은 R이고, 나를 보겠다고 내쪽으로 와 주는 것도 R이다. 그 나름의 애정표현이라고 믿고 싶은 이유다. R은 스타일이 심히 특이해서 처음 만났을 때 꽁지머리에 통바지를 입은 모습이었다. 그것도 올 블랙에 흰 양말을 신은. R은 별로 일 때 '형편없다', 괜찮을 때는 '훌륭하다'며 보통사람들보다 극적인 표현을 쓴다. 외국에 산 적이 없는 그는, 약간 남미 사람 같은 겉모습에 이런 언어적 표현이 더해져 독특한 캐릭터가 되었다. 마치 나의 아주 아주 개성 폭발한 버전이 있다면 이럴까 싶다. 그가 퇴사하고 나서, 나는 가끔 그를 형이라고 부른다.


R은 이 커피숍을 두고 '훌륭하다'를 연발했다

요즘에는 서로의 일정을 맞추기 어려워 따로 보지만, 처음에는 늘 셋이서 봤다. 셋이 삼각형을 그리고 앉아 있으면 R은 언제나 나를 놀리고 있고 나는 그에게 발끈해 있으며 P는 그걸보고 평소 여간해서는 보여주지 않는 웃음을 터뜨린다. 즐거워하는 P의 모습에, 까짓것 나 하나쯤 희생하면 어떠냐는 심정으로 겨우겨우 이어지는 인연이다.


그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둘은 어울리는 한 쌍이다


너무도 정 반대인 둘은 딱히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같이 있을 때 좋아 보인다. 5년 전 그들을 만났을 때와 지금 우리는 그다지 변한 게 없다. 내가 이직을 했고 (원래 계열사가 달라서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 R이 퇴사를 했지만 (R은 원래 회사를 프리랜서처럼 다녔기 때문에 지금과 별다르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비슷한 근방에서 일하고 있고 종종 시간을 내어 얼굴을 본다. 힘들었던 지난 회사생활에서 그나마 얻은 게 그들과의 인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사실은 깊이 감사하고 있다.


한동안 보지 못해서인지 요즘 들어 부쩍 생각이 난다. 올해 말이면 내가 다니는 회사와 P가 다니는 회사가 각각 다른 지역으로 이전할 계획이 잡혀있기 때문에 내년부터는 점심에 가볍게 얼굴 보는 것도 옛날 일이 될 것이다. 그땐 아마도, 그들이 늘 가자고 하던 부산 여행을 하는 것도 좋겠다. 이미 P와 R은 둘이서 몇 번 다녀온 부산이니 따라다니며 그들의 핫플레이스를 구경해보는 것도 좋겠다. R은 아마도 '훌륭하다'를 연발하겠고 P는 내가 놀림받는 것을 보며 웃겠지.


그때도 우리는
지금 같은 모습으로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