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8_사고의 기준 K

머리가 복잡할 때 떠오르는 그 이름

by 일랑



친구사이와 달리
상대를 고를 수 없는 곳이 사회다
그렇기에 마음 맞는 사람과의 인연이
더 값지게 느껴지는 것 같다


K를 단순하게 '좋아하는 선배'정도로 표현하기엔 영 부족하다. 나는 K처럼 일하고 싶었고, 사람을 K처럼 대하고 싶었고,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것처럼 나에게도 그런 후배가 있기를 바랐다. K가 한 말 한마디나 행동 하나가 서운한 적도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아무리 누군가를 무한 신뢰한다 하더라도, 쉽지 않은 것임은 분명하다. 보통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 크게 상처받기 때문이다.


이제는 다른회사에 다니는 구 동료들의 만남

K와는 한때 같은 팀으로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한 팀에서 같이 일한 시간은 길지 않았고 그녀가 다른 회사로 이직하기 전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어찌 됐든 그로써 우리가 만난 곳에서의 인연은 일단락되었다. K의 이직 소식에 나는 그간의 회사생활 중 가장 크게 동요했다. 그녀가 회사를 떠난 후 쉼 없이 탈출을 도모하던 나에게도 드디어 이직의 순간이 찾아온 건 그로부터 꼬박 2년이 지나고 나서였다. 그 기쁜 소식을 K에게 전했을 때 그녀가 말했다.


괜찮겠어?
너 낯 많이 가리잖아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이었다. "한 6개월은 가리잖아, 낯. 소리 내서 웃는 데만도 한참 걸렸잖아."하며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K는 내 도도하고 뻣뻣한 성격이 그저 낯가림일 뿐, 그 뒤에 마냥 불편해하고 조심스러워하는 진짜 모습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이직이라는 목표가 달성되면서 들뜬 마음에 스스로도 잠시 잊고 있었던 약점이기도 했다. 그 힘든 과정을 또 견뎌야 한다는 생각에 막막하기도 했고 K처럼 내 본모습을 살뜰히 알아봐 주는 선배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처음 K를 만났을 때, 그녀는 훤칠한 키에 길고 검은 스트레이트 머리를 높게 묶고 검은색 파워숄더 재킷을 입고 있었다. 내가 아니라도 다가가기 쉬운 이미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번 어떤 회식자리에서 K의 웃는 표정에 담긴 의외의 장난기를 발견했다. 한번 그걸 느끼고 나니 더 이상 그녀가 어렵지 않았다. 지금 K는 나에게 그저 고마운 존재다. 우연으로라도 마주칠 일 없는 다른 회사에서 일하고 있고, 딱히 무언가 오가는 것 없어도 그렇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일이 생겼을 때나 버거운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녀는 뭐라고 할지 생각해 본다. (실제로 물어보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생활의 기준이 되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K의 여동생이 운영하는 제주도의 펜션

K에게는 그녀를 쏙 빼닮은 여동생이 있다. 동생은 제주도에서 펜션을 하는데, 새로 지은 깔끔한 외관에 아기자기한 요리 솜씨를 종종 건너본 터라 언젠가 꼭 한번 가보고 싶더랬다. 마침 부모님과 함께 제주도에 갈 일이 생겨 이틀인가 묶게 되었는데, 동생과 어머님이 어찌나 극진히 대접해주시는지 되려 내가 민폐가 된 느낌이었다.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 부모님보다는 친구와 가는 게 이 펜션을 더 잘 즐길 수 있는 방법이겠기에 다음에는 친구와 함께 말이다.


한 번은, SNS에서 K가 이직한 회사의 다른 후배가 그녀를 '가장 좋아하는 선배'라고 표현한 걸 보고 새삼 느꼈다. K는 나에게만 좋은 선배가 아니라, 그 어떤 후배라도 좋아할 선배였다. 나는 어떤 선배일까, 또 후배였을까. 모두의 기억에 좋은 사람이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선배이자 후배이고 싶다는
소박한 욕심을 부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