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종류의 인연
지금까지 이 시리즈에서는 죄다 '소중한 인연들에 대해 감사한다'는 말만 쓰다 보니 나 스스로도 조금 진정성 떨어지고 지루해지고 있는 관계로 이번에는 새로운 접근을 해보고자 한다. 바로 불편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자칫 험담으로 시작해서 저주로 끝날 것 같아 여태 시도하기를 망설여왔지만 사실 이 시리즈를 '친구'가 아닌 '관계'라고 설정했을 때부터 구상했던 방향이다.
불편한 관계마저도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과정이라는 것에 대한 인정,
그리고 비로소 나아가는 것 말이다
전 회사는 나에게 여러모로 피로를 안겨주었기 때문에, 나는 종종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혼자만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나마도 이를 누릴 수 있는 게 잠시 커피를 사러 갈 때였는데, 커피숍에서 친한 유관부서 사람들을 만나면 늘 "왜 혼자 다니느냐"며 신기해했다. 나는 솔직히 그런 시선을 아직까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고작 커피 한잔 사러 가는 것도 꼭 누군가와 함께 가야 하는지. 하다못해 밥을 혼자 먹는 건 더더욱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니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전 회사 선배인 H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커피 사러 혼자도 잘 가더라, 그거 좋아 보여." 이렇듯 H와 내가 시작부터 삐걱댔던 건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에 대한 무언가에 불만이 생긴듯한 H는 아예 대놓고 표현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출근하면서 하는 아침 인사를 1년 내내 안 받는 건데, H와도 나와도 친한 동료가 왜 아침인사를 받지 않는지에 대해 물어보니 그의 대답은 매일 같은 인사여서 그렇다고 했단다. 그렇다 보니 나는 H와 말하는 기회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했는데 어쩔 수 없이 하는 질문마저도 짜증 섞어 쳐내는 등 업무에도 꽤나 불편함을 느끼게 했다.
나는 회사 동료 모두에게 순수하게 좋은 감정을 가지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서로 친분으로 만난 것이 아닌 회사의 기준으로 뽑혀 타의에 의해 만나게 된 사람들이니 오죽하랴. 그런 맥락에서 H가 (그 이유의 유무를 떠나) 충분히 나를 싫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직의 취지에 맞게 서로 일하는 데 있어서는 개인적인 감정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H의 일방적인 태도가
부당하다 생각하면서도
후배이기 때문에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 번은 팀 회의 중에 H와 어떤 기획서를 작성하라는 팀장님의 지시가 있었는데, 나와 H의 사이가 별로 안 좋은 것을 알고 있던 같은 팀 동기가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나에게 메신저로 "어떡하냐, 하기 싫겠다"라고 보내려던 것을 H에게 잘못 보낸 것이다. (심지어 나는 아무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음에도) 그 길로 H에게 불려 가서 영문도 모른 채 온갖 비난의 화살을 받아내야 했고, H는 잘 걸렸다는 듯이 그동안의 분풀이를 다 해버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다음날 실수했던 동기에게 H가 전화로 이렇게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미친 듯이 화가 났는데 생각해 보니 후배인 너희가 나에게 불만이 있을 수 있겠다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반성일까, 아니면 사과? 그렇다면 왜 분풀이를 당한 내가 아닌 그 동기에게? 이해할 수 없는 전개였다. 혹시라도 동기를 통해 어쭙잖은 화해의 제스처를 보낸 거라면,
"나는 이거 못 들은 걸로 할게"가
내 대답이었다.
이후로도 다른 동료들은 H가 유난히 나에게 삐뚤게 군다 했지만 나는 더 이상 개의치 않았다. 그저 배웠을 뿐이다. 선배로써 후배에게 하게 되는 별것 아닌 행동들이 약자에게는 얼마나 공격적일 수 있는지. 회사를 떠나면 서로 메일 것 없는 사이에 마치 영원히 누군가의 윗사람 일 것처럼 굴어서도 안된다는 것을. 이직의 가장 큰 이유가 사람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런 이유로 하는 이직이 가장 큰 위험이라고 생각한다. 어딜 가나 안 맞는 사람은 있을 수 있으니까. 다행히도 나는 내 불만을 분출하지 않고 끝까지 참아냈고 딱히 H에게 잘못했다고 생각할만한 일이 없기에 깔끔하게 떠나올 수 있었다.
이직 2년 만에 안면만 있던 전 회사 다른 팀 사람을 만날 일이 있었다. 안 그래도 한동안 내가 안보이길래 나와 같은 팀이었던 H에게 어떻게 된 거냐 물으니 이러더란다. "다른 데 간 거지 뭐. 아쉬운 일이지." 어른들의 세계란 원래 이렇게 가식적인 걸까. 아니면 H가 대놓고 한 욕을 전하는 사람이 알아서 생략한 걸까. 물론 떠나온 이상 H에 관한 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다짐만 남았을 뿐이다. 같은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지 않겠다는. 과거에 속상해할 시간을 차라리 지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쓰겠다는.
이 글을 마지막으로
남은 감정마저
덜어내겠다는 다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