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ily ever after
일본어 회화반으로 가야 하는 시점이 오자 망설여졌다. 자신이 없어서다. 스스로 준비되었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었고 자신감도 바닥이었다. 현지인 회화반을 가기 전에 한국인 선생님과 문법을 복습하고 기초 회화를 공부하는 반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개강되지 않았다. 한번 흐름이 끊기니 망설임은 깊어졌다. 이렇게 일본어와는 사요나라인가 보다며 쓰게 웃었다.
그런데 근래 몇 년간 없었던 일본 출장이 갑자기 나에게 떨어졌다. 처음에 가기로 되어있었던 출장지는 쿠알라룸프르였는데 급작스럽게 변경된 것이다. 이건 운명이구나 싶었다. 다시 힘을 내어보자며 의욕으로 불타올랐다. 회사 앞 학원에 토요일반이 있었지만 주말까지 출근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아 동네로 알아보았다. 변두리이다 보니 학원의 퀄리티가 썩 마음에 와 닿지 않아 다른 궁리를 하다 과외도 방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그렇게 일본인 과외 선생님과의 공부가 시작되었다.
나는 이미 기초를 4개월 한 상태였으나 두 달간의 공백(과 모든 기억을 쓸어간 중국어 쓰나미)으로 복습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선생님은 배운 게 아깝다며 어쩔 줄 몰라하시지만 나는 기꺼이 새책으로 기초를 복습하고 있다. 다만 일주일에 한 번으로는 진도가 아쉬울 따름. 알았던 것들도 까먹어가며 제자리걸음의 비싼 취미생활을 하는 중이다. 발전이 없자 선생님도 당황스러우신지 결국 단어시험이라는 처방을 내리셨다. 시켜야 하는 나란 학생. 그나마 좋은 점은 회화위주의 수업으로 바뀌면서 굳게 닫혔던 입이 조금 트인다는 것인데, 그래도 한국어 비중이 높은 편이다. 선생님이 한국어를 너무 잘 하시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본어를 쉬는 두 달간 중국어 입문 과정을 들었더랬다. 배우는 내내 따라가기 버거운 느낌이었는데 두 달이 끝나고 나니 또 회화반에 가란다. 두 손을 휘휘 저으며 두 달 전 배운 진도에서 다시 시작했다. 똑같은 과정을 두 번째 들으니 우등생 내지는 천재가 된 기분이다. 단어시험도 한번 외웠던 것들로 보다 보니 어지간해서는 틀리지 않는다. (처음에는 20개 중 3개~4개 정도는 틀렸었다.) 이제야 정말 취미로 한다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처음 배울 때 놓쳤던 것들마저 꼼꼼히 훑으며 지나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집 근처에서 과외로 시간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게 된 일본어와 달리 중국어는 또 하나의 변수를 마주했다. 회사가 지금 위치에서 이전하게 되는 것이다. 길 건너 너무나도 좋은 위치에 있었던 학원과 멀어지면 더 이상 학원에서 공부를 이어가기는 힘들다. 인강이나 전화중국어 등 다시 한번 다른 방법을 알아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일본어처럼 기적적으로 나에게 꼭 맞는 수업 방법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지금은 쉬어가는 중이다.
중국어와 일본어를 동시에 배우고 있는 내가 가장 자주 듣는 질문은 "헷갈리지 않느냐"는 것이다. 아직 둘 다 기초여서 그런지 사실 크게 혼동되지는 않는다. 다만 주중에 중국어 공부를 내리 하다가 주말에 일본어를 하려면 수업 초반은 헤매기 일쑤다. 그런 버퍼링 현상은 중국어를 하지 않아도 일주일 텀으로 하는 수업이라면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두 가지를 같이 하니 좋은 점도 있다. 한자를 외울 때 겹치는 것이 꽤 있다는 것이다. 정확히 모르는 한자도 생김새를 보고 뜻을 약간 유추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다만 중국어 간체 때문에 오히려 생김새가 약간만 다른 경우에는 더 헷갈린다. 나 같은 경우 이미 영어로 외국어의 벽이 어느 정도 허물어져 있는 상태 (외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하기보다는 그 언어 자체로 생각하는 방법이 익숙)이기 때문에 두 언어의 차이를 그러려니 하며 받아들이고 있다.
해외에서 살았던 관계로 내게 영어공부 방법을 묻는 사람이 많다. 어릴 때 영어를 접한 나와는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그때마다 냉혹한 현실을 이야기하는 내 마음도 아프지만 "어른이 되어서 하는 영어공부는 내가 영어를 얼마나 못하는지에 적응해가는 과정"이라는 표현을 쓴다. 엄청난 발전을 기대하기보다는 내 수준에 익숙해져서 그나마 아는 단어라도 잘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성인의 영어공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나에게 중국어와 일본어가 그렇다. 취미로 하는 언어 공부의 한계에 너무 초조해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요즘도 내가 중국어와 일본어를 얼마나 못하는지에 열심히 적응해 나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