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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달이 Jan 08. 2022

'잘한다.' 칭찬하지 마세요.

공부와 친해지기(어린 시절의 사고 형성).

공부를 하는 것이 왜 어려운 지,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주제로 첫 번째 글에서 다룬 적이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글쓴이가 생각했던 가장 핵심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의무감'이었다. '어찌 됐든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막연한 무의식 속의 인식이 공부를 더 하기 싫고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심지어 그로 인한 경쟁에서 '패배감'까지 느끼게 하고 자존감을 깎아먹는다면? 공부에는 책임감과 부담감, 노력해도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동반되기도 한다. 이런 공부를 대체 누가 하고 싶단 말인가? 그런 공부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는 언제 형성되는 것일까?

... 초등교육업체 시공교육의 초등학습연구소는 26일 전국 초등학생 980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가장 큰 고민거리를 묻는 질문에 ‘학교 성적’을 꼽은 응답자가 32%로 가장 많았다. ‘친구 관계’와 ‘무서운 담임선생님’을 꼽은 학생이 각각 14%와 13%였지만 성적 고민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학교 성적은 친구를 사귀는 문제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조사됐다. ‘새 학년에는 어떤 친구와 친해지고 싶으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33%가 ‘공부 잘하는 친구’라고 답했다. ‘착하고 친절한 친구’(23%)는 2위로 밀렸고 ‘재미있는 친구’(15%)도 ‘공부 잘하는 친구’의 인기에는 크게 못 미쳤다. 고학년보다 '저학년이 친구 성적에 예민'했다. 

이는 아직 독립성이 자라지 않은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이 학부모의 판단 기준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로 분석된다. 학부모가 ‘공부’의 중요성을 과도하게 강조하거나 성적을 기준으로 자녀와 친구들을 판단하면 그 자녀 역시 자연스럽게 성적을 중심으로 교우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선호하는 담임교사 유형을 묻는 질문에는 ‘수업을 잘하는 선생님’(25%)을 가장 많이 꼽았다. 외모가 예쁘고 멋진 교사를 선호한 학생은 2% 남짓으로 꼴찌를 기록...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8082632

위 기사를 보면서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던 부분이 오히려 초등학교 고학년 친구보다 저학년 친구들이 성적에 더 예민하여 친구를 사귈 때 성적을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영유아기 때야 장소에 따라 가정어린이집, 영어 어린이집, 가정양육(이 부분은 요즘은 학대로 의심될 수도 있어 점검을 받아야 함) 등 / 방식에 따라 조기교육, 선행교육, 기본적인 생활교육 등 여러 가직 교육방식을 가질 수 있지만 초등학교를 입학하는 8세 이후로는 (대부분이) 수능을 칠 때까지 우리나라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교 수업 또는 사교육(학원, 과외) 이렇게 두 가지 방식의 교육을 받게 된다.


집에서 부모님 하고만 시간을 보낼 때를 지나 첫 번째 '사회'인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가게 되면 아이들은 거기서부터 다른 아이들(타인)과의 '경쟁'에 노출되게 된다. 아이에 따라서는 부모님 품을 떠나 있는 것만으로도 두렵고 어려운 일인데 무한한 사랑을 주는 부모님이 아닌 개념 없고 같은 수준인 또래의 타인과 지내는 것이 얼마나 또 큰 부담일 것이며 거기서 여러 가지 항목으로 '비교'를 당한다는 것이 또한 얼마나 어려운 일일 것인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두 가지 동기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성적 욕구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다. (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에서 발췌)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는 이것을 좀 더 세밀하게 나눠서 표현했는데, 

1. 건강과 생명의 보존
2. 음식
3. 잠
4. 돈과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
5. 내세의 삶
6. 성적 만족
7. 자녀의 행복
8. 중요한 존재로 인정받는 느낌

프로이트는 '위대해지고자 하는 욕구'라 불렀고 존 듀이는 '중요한 존재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라고 불렀는데 인정 욕구이다. 인정 욕구의 크기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사람에 따라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더 잘되고자 하는 마음을 뛰어넘기도 하고 남보다 더 낫다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옳지 못한 일을 저지르게 하기도 하고, 이성을 마비시켜 자신을 파괴하기도 한다. '카푸어', 'SNS에서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리플리 증후군 중독자', '도를 넘는 인터넷 방송인' 모두 인정 욕구가 이성을 뛰어넘어 자신의 삶을 수렁에 빠뜨린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재물욕이 동반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이런 부분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사람(상대적으로 결핍이 적은 사람이라고 생각된다.)도 누군가 나의 존재 가치나 나의 행위, 나의 언행, 나의 창작물을 보고 칭찬해주면 기분이 좋다.


어른도 그러할진대 어른 아이들(영유아)들은 오죽하겠는가? 아이들일수록 그런 욕망에 솔직한 법이며,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어린이집에서 발표를 잘해서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는다거나, 반에서 1등을 해서 칭찬을 받고 선생님에게 인정받고 같은 반 학우들에게 인정받는다거나, 영어 발음을 잘해서 칭찬받는다거나, 남들은 풀지 못하는 문제를 풀지 못해서 칭찬을 받는다거나 칭찬은 그 자체만으로 모두 어떤 행위에 대해서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아주 긍정적인 수단이다. 하지만 글쓴이의 경험상, 칭찬은 양날의 검이다.


프레드릭 스키너가 행동주의 안에서 학습에 관해 이야기한 '조작적 조건 형성'이라는 이론이 있다. 이 이론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어떤 행동은 상과 벌을 통해 강화시킬 수도 있고,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강화'와 '행동 조성'인데,


1. 어떤 행동을 하면 상을 준다 → 그 행동의 빈도가 증가(동기부여)

2. 어떤 행동을 하지 않으면 상을 준다 → 그 행동의 빈도가 감소

3. 어떤 행동을 하면 벌을 준다  → 그 행동의 빈도가 감소

4. 어떤 행동을 하면 불편한 것을 제거해 준다  → 그 행동의 빈도가 증가


이렇게 네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실험동물에게 행한 걸 가지고 직접으로 사람에게 바로 적용하는 것이 맞냐 하는 문제가 있지만 '당근과 채찍' 이론도 사실 근본은 스키너의 조작적 조건화이다. 사람에게도 적응해도 어느 정도는 맞다고 본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처럼 1번. 에 따라 칭찬(인정)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좋은 자극(일종의 동기부여)이 되어 그 행동의 빈도를 늘리게 하는 정적 강화를 일으킨다.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 칭찬을 하는 것은 다시 공부를 더 할 수 있게 해주는 동기부여가 된다는 것이다. 어떤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 상사로부터의 칭찬이나 동료들로부터의 인정은 힘들지만 그 일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 있기 전까지, 글쓴이도 잘했을 때 칭찬을 하는 것이 무조건 좋은 일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중고등학생들이 보통 가장 어려워하는 과목이 수학이다. 실제로 과외 경험 중에도 수학 과목을 한 경우가 가장 많았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이 처음에 자신의 점수를 말하는 것부터를 어려워한다. 이것도 인정 욕구라는 가장 인간의 근본적인 본능을 무시하는 일이기에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글쓴이는 과외를 하기 전에 항상 부모님과 함께 상담을 진행했었는데, 대체로 부모님은 '나는 할 만큼 했다. 얘가 못하는 거다.'라는 입장이 강했고 학생은 '부모님이 하라 하니까 억지로라도 한다.'라는 입장이 강했다. 부모님은 돈은 돈대로 쓰고, 학생은 저런 마음으로 공부를 해서(동기부여가 1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얼마나 얻어가겠는가? 이런 학생의 성적을 올리기 위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학생의 고생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부모님들은 학생의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학생이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힘든 것도 없고 고생한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적이 좋든 나쁘든 학창생활은 쉽지 않다. 친구들 간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힘들고, 특히, 고등학교는 초중등학교 때보다도 더욱 성적에 따른 학교생활의 질 차이가 심하다. 매일 아침 학교에 가서 자유라고는 없이 하루에 6시간에서 10시간을 수업을 듣는다고 생각해보라.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글이 유행하고 공감을 얻기도 했으니, 그때 학창 시절의 학생들은 정말 전쟁터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군인이 전쟁에 나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터에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군인이 어렵고 힘들지 않은 것은 않지 않은가? 정말 참된 칭찬을 통한 동기부여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그 고생을 인정해주는 것에서 오는 것 같다. 그렇지 않은 칭찬은 지금의 용어로 말하자면 일종의 '가스 라이팅'이다.


학부모 상담을 하다 보면 참.. 자기는 어떻게 했고 뭘 해줬고 공부를 못하는 것(정확하게는 성적이 낮은 것)을 아이만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심지어 아이가 옆에 있어도) 그리고 보통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몇 학년까지 뭐는 잘했었다. 언제부턴가 이렇더라. 뭐 수학을 어려워하더라.. 이런 이야기를 많이들 한다. 여기부터가 이번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선생님, 우리 애가 3학년 때까지 참 수학을 잘했어요. 학교 시험도 늘 100점 맞고. 근데 4학년부터 한 두 개씩 틀리더니, 지금(중1) 이제 아예 수학하기가 무섭다고 하네요."


"아, 네. 많은 친구들이 중학교 수학 때부터 어려움을 느낍니다. OO이 만의 일은 아니고, 하면 됩니다.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제가 3학년 때까지는 OO 수학 잘한다고 참 칭찬도 많이 해줬었거든요. 근데 4학년 때부터는 수학에 대해서 물어보면 '잘 모르겠다.'고만하고 다른 이야기를 계속했었어요."


"음.. 어머니가 문제셨네요."


이렇게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어안이 벙벙했다. 학부모는 자기가 하는 말과 행동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착각에 빠져 자기가 아이에게 하는 것은 모두 아이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신념'을 가진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군지 아는가? 메타인지 없이, 검증 없이 무조건 자기는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람은 절대로 무조건 옳을 수 없다.) 자신의 감정에 빠져 아이를 때리면서도 아이를 훈육한다고 믿는다. '이런 버르장머리는 어릴 때 고쳐야 네가 커서 잘 살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서. 사실은 자기가 공부를 못했어서 그것이 전위되어 아이가 공부를 잘해서 본인이 뿌듯하고자 하는 마음에 아이에게 공부를 시키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다 너 잘되라고 공부하라는 거야.'


이것이 진심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자기가 해본 것을 아이에게 시키는가 아닌가 하는 것을 보면 되고 아이가 그것을 하면서 얼마나 힘들지 자기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할 수 있는가 없는가 이다. 일단,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의 공로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내 아이가 의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이 있다. 하지만 그 부모님은 의사가 아니다. 그러면 그 부모님은 의사가 된 아이들이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고 얼마나 많은 지원을 받았고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내 아이를 위한다.'는 심정으로 그 아이가 겪을 고생과 고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도 해보지 않은 길로 아이를 몰아넣으려 한다면 이것은 아이도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지금 하는 공부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부모의 인정 욕구'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아이가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아이를 위한 공부를 시킬 때도 조심스러워야 한다. 칭찬 한 마디를 해도 이것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민해야 한다. 아이는 부모의 자격이라는 절대 침범 불가능한 명목을 가지고 '공부'라는 고통 속에 몰아넣고 자신은 다른 것을 즐긴다면 나는 이런 부모는 '소시오패스'거나 그보다 못한 존재라고 생각된다. 자신의 아이는 현재 수험생활에 고통받고 있는데 옆에서 자기 하고 싶은 것을 아무렇게 않게 하고 있다면 이것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역지사지가 안 되는 것, 남의 고통을 알지 못하는 것 이것이 바로 소시오패스이다. (사이코패스는 실제 시상하부라는 기관에 문제가 있는 호르몬성 질환으로 공감능력의 부족을 동반한 파괴적, 살인적 성격을 지닌다.) 정말 아이를 사랑한다면, 아이가 고통받는 것 자체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함께 노력해야 한다.


자, 그러면 위에 어머니와 나눴던 대화에서 글쓴이가 어머니가 문제였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말 미세한 단어의 선택 차이지만 아이에게 '수학을 잘한다.'라고 칭찬했던 것이 문제다. 이 어머니는 학년에 따라 아이가 무엇을 배우는지에 조차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는 대부분 '연산'을 배우지 수학을 배우지 않는다. 과목 이름만 수학이다. 아이는 단순 계산인 연산을 열심히 해서 초등학교 때 성적을 잘 받았던 것이지 수리적 사고를 요하는 '수학'을 잘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저학년이 이 아이가 '수학을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하겠는가?


'아.. 수학을 잘하면 칭찬을 듣는구나..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또는 '아.. 내가 그래도 수학을 잘하는 편이구나.' 이런 종류의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앞의 경우에는 이 칭찬이 정적 강화로 아주 잘 적용된 예지만.. 인간이란 동물은 자신을 낮춰보고 더 발전하려는 성향보다 자뻑에 취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뒤의 경우로 생각하는 아이들도 많이 있다. 뒤의 경우(진한 글자) 생각하게 되는 스타일이 아이들에게 저런 류의 칭찬은 그야말로 독이 되는 것이다.


사실, 수학이라는 과목은 선행학습을 2년 이상 앞당겨한 것이 아닐 때, 또는 과학고 입학자 수준이 아닐 때 최소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야 '진짜' 수학을 잘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중학교도 아니고 고등학교 입학 시기도 아니고 정말 수능 직전에 가서야 수학을 잘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초등학교 저학년에게 수학을 잘한다고 칭찬을 하면 앞으로 그 아이의 삶에서 수학을 공부하기가 얼마나 부담스럽고 힘들어지겠는가? 실제로 아이들이 4학년 때, 중학교 올라오면서, 고등학교 올라오면서,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수학의 벽을 경험한다. 저 모든 벽을 넘어서 딛고 올라서야 '수학을 잘한다.'는 칭찬을 들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전에 그런 칭찬을 듣고 그 칭찬에 별 의미를 두지 않고 더 열심히 해야지 하는 정적 강화만 이루어진다면 그 칭찬은 긍정적인 효과를 거둔 것이지만 만약 자신이 정말로 수학을 잘한다고 믿게 된다면 그야말로 수학을 못하는 자신을 회피하고 싶고 수학 자체를 회피하고 싶어지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어릴 때 어떤 말을 듣고 박히는 인식(각인되는)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자신은 수학을 잘한다고 믿고 알고 있었고, 부모님도 그렇게 말했었는데 4학년이 되니 '수학'에서 내가 모르는 부분이 생기는 것이다. 게다가 부모도 원래 잘한다고 생각했던 것을 못하게 되면 '너 왜 그래? 수학 잘했었잖아.' 이런 식으로 아이가 그것을 회피하고 멀어지는데 더 가속화하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된다. 수학 과목 과외를 많이 했다 보니 수학에 대한 이야기로만 글이 전개되었는데 다른 과목들도 위와 유사한 경우가 발생한다. 그냥 말 잘 듣는 아이로 키우고 싶어서 하는 칭찬은 위에 말했듯 '가스 라이팅'에 불과하다. 상대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조종하는 수단으로 쓰이는 칭찬이다. (자매품으로 '엄마 마음 알지?'가 있다. 이런 류의 말들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 되겠는가? 아이를 통해서 스스로의 결핍을 채우려고 하지 말라.)


정말로 아이를 사랑한다면, 칭찬할 때 말 한마디도 유심히 고민해서 해야 한다. 내가 지금 하는 말이 차후에 아이에게 어떤 역할을 미칠지 끊임없이 고민하라.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삶이란 고통이다. 하나의 개체로서 나와 다른 존재와 어울려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나이에 따라 장소와 그 대상만 바뀔 뿐(영유아기-어린이집, 유치원 / 유년기-초등학교 / 청소년기-중고등학교 / 청년기-대학교, 직장 / 어른-직장, 가족관계)이지 모두가 같은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내가 지나왔기 때문에, 지금 내가 겪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고통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은 사고방식이 아닌 것 같다.


아이를 칭찬할 때도 아이의 그 고통을 인정해주는 칭찬을 먼저 하라. 성적이 좋지 않다고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해도 안 오르는 성적 때문에 아이는 더 힘들고, 앉아있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수업을 버티는 것이 지옥이다. 오늘도 공부하느라 고생했다고 칭찬(인정)하고, 아이가 늘 돌아올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힘을 내서 도전할 수 있도록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그 아이를 부모('나')의 기준으로 규정하지 말라. 그 규정은 '보이지 않는 감옥'으로 작용하여 아이가 무엇인가를 하는 것에 의무감을 부여하고 부담(잘 못하면 어쩌지..)을 준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자신을 비난하게 된다. '너 원래 수학 잘했잖아?' 이 말은 그 아이를 난도질하는 말이다. 그 아이를 무시하는 말이다. 내가 당한 것을, 나의 인격을 아이에게도 전가하지 말라. 규정되지 않는 자유 속에서 마음의 짐 없이 도전하고,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아낼 때 참된 동기부여가 된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첫 번째 글에서 말했듯 우리나라 사람 중에 머리 나쁜 사람 거의 없다(전 세계에서 IQ가 제일 높은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바른 방향과 접근방식과 방법으로 자신을 규정한 모든 것에서 벗어나 '공부'에 도전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 이 글을 읽고, 혹시 내가 그런 부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신다면 당신은 그런 부모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글을 읽고, 뭐 저런 부모가 다 있냐? 하는 생각이 드신다면 내가 그런 부모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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