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늘 내 곁에 머물렀다.
아마 아주 어린 시절부터였을 것이다. 글과 가깝게 지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엄마는 그때 한창 해리포터를 읽었고 그런 엄마를 따라 나와 여동생은 식탁에 모여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렸다. 초등학생 땐 만화책을 좋아해서 비디오 가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특히 엄마 아빠가 집에 없는 날에는 순정 만화책을 전권 빌려와 하루종일 읽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날들 속에서 나는 만화가를 꿈꾸기도 했고, 소설가를 꿈꾸기도 했다. 어렸을 때도 나는 큰 야망은 없었고 좋아하는 걸 하고 싶었다.
앞서 말했던 순간들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오래 자리 잡고 있다. 그때 우리 집은 남서향 집이었고 여름이면 햇빛이 많이 들어와 거실 곳곳에 열기로 가득했다. 기다란 햇빛의 그림자가 거실 바닥에 드리우면 우리는 좀 더 시원하고 햇빛이 닿지 않는 식탁에 앉아 주로 시간을 보냈다. 엄마는 십자수를 하거나 주로 책을 읽었다. 나는 엄마를 따라 책을 읽거나 원고지에 글을 썼고 여동생은 그림을 그렸다. 그때 내가 처음 쓴 글은 아마도 마녀를 주인공으로 쓴 소설이었다. 서툴게 써 내려간 글씨로 맞춤법도 띄어쓰기도 최대한 지켜보려 했으나 실패한 흔적이 가득했다. 지금 그 글을 다시 읽어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 번째 글은 어렴풋하게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중학생 때는 인터넷에 글을 연재했다. 거실 한편에 놓인 컴퓨터에 앞에 몇 시간을 앉아 글을 써 내려갔고, 가족들이 볼 것 같으면 작은 손으로 모니터를 가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누군가 내 글을 읽어주길 바랐고, 내가 쓴 글에 댓글이 달리면 그 글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때는 글을 쓰는 게 재밌었고 지루하지 않았으며 질리지 않았다.
글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건 열일곱 겨울이었다. 주변에 글을 쓰는 사람은 없었고 그때는 문예창작학과가 있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저 글을 쓰는 걸 좋아해서 좀 더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은 마음에 학원을 알아봤다. 학원은 사당역 10번 출구에 있었고, 골목 사이에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었다. 동그랗게 모여 앉아 내가 쓴 글로 합평을 했고 그때는 정말이지, 저 문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날 처음으로 누군가 객관적으로 내 글을 봐줬던 날이기도 했다.
학원을 다니면서 나는 매일 필사를 하고, 소설을 읽고, 수상작품들을 읽으며 백일장에서 상을 타기 위해 노력했다. 교실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기차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들이 더 많았다. 진해에서 열리는 백일장에 참가하던 날엔 너무 일찍 도착해서 편의점에 들어가 친구들과 돌아가면서 잠을 자기도 했다. 전국에서 열리는 모든 백일장에 거의 참가를 하면서 상을 타기도 했고, 그 멀리까지 가서 어떤 상도 받지 못하고 돌아오는 날도 있었다. 내 글은 점점 백일장을 위한 글, 입시를 위한 글이 되어갔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한 글을 썼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별반 다를 것 없었다. 그러다 보니 글을 쓰다가 멈추기를 반복했고 누군가의 글을 읽으며 자괴감에 빠지곤 했다. 그때 내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이렇게밖에 쓰지 못하는 당장의 현실과 앞으로 좋은 글은 영영 쓰지 못할 것 같다는 확신에 차 오래 두려움을 느끼며 작게 울었다.
내 글은 오랜 학습으로 인해 꼭 채점을 기다리는 시험지 같았고, 어느새 세상에는 다양한 글들로 가득했다. 너무 한낮의 연애가 내겐 그랬다. 아니, 애초에 세상에는 다채로운 글들이 차고 넘쳤는데 내가 그걸 보지 못했던 것뿐이다. 그날을 시작으로, 내가 좋아하는 글을 조금씩 찾아갔다. 이제야 글을 쓰는 게 다시 재밌어졌다. 늘 글을 써왔지만 그동안 글은 내게 있어 잘 쓴 글과 못 쓴 글의 선택지 속에 남아 나를 바라봤다
내 글을 내가 품어주지 못한 숱한 시간들, 그럼에도 글을 놓은 적은 없었다. 글은 참 이상하다. 나를 괴롭게 만들다가도, 어디서도 겪어 본 적 없는 충만한 감정으로 내 몸속 깊숙이 자리를 잡아 계속해서 쓰게끔 만든다.
앞으로 이곳에 써 내려갈 글들은 내가 기억하는 순간들, 나를 스쳐갔던 수많은 감정과 생각들, 오래된 어느 과거의 순간들을 회고하는 글이 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문장들을 그러모아 하나의 순간들을 이곳에 기록하며 오래 그리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