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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를보다 Jul 19. 2023

[소개팅만 50번째] 프롤로그

 좋아, 나도 이제 청승맞은 솔로생활 청산이다. 외모, 나쁘지 않고. 직업, 훌륭하고. 은근히 코드도 잘 맞는 것 같다. 다만, 인천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약간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서울에서 인천까지 지하철만으로 충분히 오갈 수 있을뿐더러 이렇게 자차까지 가지고 계시니, 서로 노력하고 배려한다면 특별히 문제 될 것 없어 보였다. 게다가 운전하는 것을 좋아한다며, 언제든지 서울로 데릴러오고 데려다주겠다고 하는 그의 말이 알맹이 없는 빈 껍데기일지언정 좋았다.


 “아, 뒷 좌석에 담요 있는데 드릴게요.” 잘 보이려고 평소에 잘 입지도 않는 치마를 입어 훤하게 드러난 허벅지가 민망해 자꾸만 들썩거리는 나를 위해 그는 친히 뒷 좌석 쪽으로 몸을 돌려 담요를 건네주는 센스까지 보여주었다. “어, 괜찮은데, 감사해요.”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헤실헤실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기 어려웠다. 고개를 돌리자 부각되는 그의 날렵한 왼쪽 턱선에 심장이 외쳤다. ‘두근, 나 여기 살아있어요, 두근.’ 하늘색 배경에 몽실몽실 하얀 구름이 촘촘히 박혀있는 담요에서는 은은한 섬유유연제 향이 폴폴 풍겼다. 어쩜, 귀엽기도 하지 빙긋 웃으며 담요를 무릎에 펼친 순간. 내 심장은 악 소리도 못 내고 그대로 다시 굳어버렸다.


 왜 이 놈이 여기 구름 위에 붙어있을까. 이 담요가 내 무릎 위에 오기 전까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실밥은 당연히 아니고, 머리카락은 확실히 아니고, 이 놈은, 다른 녀석들보다 유난히 좀 억세고 찌끌찌글한 자태로 보아 이 놈은 겨드랑이에 있었거나, 아니면 은밀하고 소중한 그곳에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여기 세워드리면 될까요?” 사실은 한 블록 더 가야 했지만, 나는 맞다고, 감사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담요와 그놈을 얌전히 들고 원래 있던 자리에 놓아두고는 황급히 차에서 내렸다. 다음에는 술 한잔 하자며, 연락하겠다는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달콤하지 않았다. 온통 머릿속에는 구름 위에 깜찍하게 붙어있던 그놈 생각뿐이었다. 그의 친절과 구름 위의 그놈이 잘못된 건 분명 아니었다.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놈이 머릿속에 이미 깊숙이 박혀버려서 내 심장을 움직이게 한 그의 날렵한 턱선도, 빛나던 센스도 바람에 흘러가는 저 구름처럼 멀리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뇌리에 꽂히는 사소한 단점이 상대의 모든 장점들을 볼품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그것이 소개팅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혹자는 첫인상만으로 상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느냐 묻겠지만 첫인상만으로 상대를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소개팅이다. 소개팅이라는 이 치열하고도 끔찍한 전쟁터에서 나는 과연 전설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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