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분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날 아프게 한 놈, 내가 제일 힘들 때 날 차버린 놈이 미워 죽겠으면서도 보고 싶어서 질질 짜는 내가 싫어서 분통이 터졌다. 함께 제주도 여행을 가기로 약속한 전날, 늦은 밤. 이별을 암시하는 그의 전화를 받고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4년을 넘게 만나면서 여행 한 번 못가 본 우리였다. 처음으로 떠나는 여행에 잔뜩 기대에 차서 어설픈 솜씨로 도시락까지 싸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내 모습을 떠올리자 그런 내가 불쌍하기도 하고 추접스럽기도 하고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설레발친 꼴이 된 것이 수치스러워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다.
“우리 생각할 시간을 좀 가지자.”
생각할 시간을 가지자는 말은 도대체 누가 처음 만들어 낸 걸까. 누군지는 몰라도 이별에 대한 모든 책임과 죄책감을 자기 혼자 짊어지게 될 것을 두려워했던 겁쟁이였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냥 헤어지자고 하면 간단하고 깔끔하게 끝날 일을 왜 굳이 시간을 갖자는 말로 고통의 시간을 늘리는 걸까.
“지금 헤어지자는 거야?”
“아니,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시간을 가지자는 거야.”
생각할 시간을 강제로 부여받은 나는 우리의 관계에 대해 생각할 것이 없었다. 나에게 ‘생각할 시간’이라는 것은 이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그의 최후통첩만을 기다리는 형벌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왜 하필 지금이야?”
수화기 너머의 그는 입을 꾹 닫고는 말이 없었다. 왜 하필 지금 이어야 했을까. 가장 그의 품이 절실한 지금 이 시점에 왜 그는 내게서 도망치려 했던 걸까.
“뭐 때문에 그런 건데, 내가 다 고칠게. 같이 헤쳐나가자. 이유라도 말해줘.”
“네가 잘못한 거 없어, 계속 너랑 같이 있으면 내가 이 생활에 안주할 것 같아. 헤어지자는 거 아니야, 그냥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그래.”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하니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고 빌 수도 없고, 헤어지자는 게 아니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니 제발 헤어지지 말자고 바짓가랑이 붙들고 보챌 수도 없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줄 수밖에. 하지만 반전은 없었다. 피 말리는 형벌이 끝나고, 우린 헤어졌다. 정확히 그때부터였다. 내가 이 소개팅 전쟁에 뛰어든 것은.
나의 소개팅 일대기는 그렇게 갑작스러운 이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히는 법. 난 주변 친구들에게 솔로가 되었음을 선포했고, 그때부터 들어오는 소개팅은 단 하나도 거절하지 않고 모두 출전했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공들여 다듬어온 내 입맛에 꼭 맞는 완벽한 짝이 머릿속에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으니, 그 어떤 소개팅이건 잘 될 리가 없었다.
소개팅을 나갈 때마다 마치 그놈과 함께 나가는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상대방을 그놈과 끊임없이 비교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외모, 말투, 성격, 하다못해 단점들마저도 어느 하나 비슷한 구석이 있기만을 바라며 상대가 아닌 그놈에게만 집중했으니, 상대방의 매력과 장점은 하나도 보지 못할 수밖에. 새로운 사랑으로 옛사랑을 잊으려던 호기로운 시도는 옛사랑을 어떻게든 그 비스무리한 것으로 대체하려는 치졸한 시도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둘이 아닌 셋이서 함께했던 소개팅을 마치고 오는 날이면 하루도 빠짐없이 울면서 집에 돌아왔다. 그놈과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도 만나는 날이면 더더욱 선명해진 그놈을 정말 사무치게 그리워했다. 운 좋게 좋은 분을 만나 소개팅 분위기가 나쁘지 않게 흘러갔던 날에도 여지없이 집에 터덜터덜 돌아가는 길이면 꼭 장날에 팔려가는 소가 된 기분을 느끼며 침울해했다. 뭘 그렇게 까지 생각하느냐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내가 느끼는 기분은 정확히 그랬다. 안 그래도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인 내가 난생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나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고, 상대방의 말에 공감할 수 없어도 공감해줘야 하는 억지스러운 소통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이별을 하고 3개월 정도 지난 때였다. 회사에서 지출업무를 맡고 있던 나는 주된 업무 중 하나가 은행에 가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회사 회계업무처리를 전담으로 맡아주던 은행원이 있었는데, 거의 매일 은행에 출근 도장을 찍다 보니, 갈 때마다 은행업무만 보고 홀랑 돌아서는 게 무안하기도 해서 종종 사탕이나 초콜릿을 가져가서 입금전표와 함께 올려두곤 했었다. 그러면 그녀도 막대사탕 하나를 쥐어주거나, 비타민을 한 봉지 건네주기도 했다. 오고 가는 간식 속에서 싹튼 우정 안에서 우리는 서로 동갑이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어느 날은 내게 남자친구가 있느냐 묻더니, 소개팅을 하겠느냐고 물었다.
“남자친구 없어요.”
수줍게 웃으며 대답하자, 그녀는 너무 잘됐다며 휴대폰 속 사진을 하나 보여주었다.
“제 친구인데, 소개 한 번, 받아보실래요?”
사진 속의 K는 무척이나 훈훈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사진 뒤의 배경으로 보이는 술병들과 눈빛에서 흘러나오는 자신감으로 보아 굉장히 외향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외향적인 성향과는 잘 맞지 않을 텐데, 살짝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오직 한 가지 목적, 지난 사랑을 새로운 사랑으로 잊고야 말겠다는 굳센 마음을 먹은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승낙했다.
“저야 감사하죠.”
그날 저녁, K에게서 연락이 왔고 우리는 그 주 토요일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외향적인 사진 속 이미지에 걸맞게 K는 붙임성이 좋았고, 우린 얼굴도 한번 보지 않은 사이임에도 마치 연인이 된 것처럼 아침에 눈 뜰 때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일상을 공유했다. K는 그 해, 대기업에 취직한 신입사원이었고, 당시에 나도 취직한 지 1년이 채 안된 상태였기에, 서로 신입사원으로서의 고충을 토로하며 공감대를 형성해 나갔다. 마치 오래된 친구사이인 것처럼 어색하지 않게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서 이번 소개팅으로 어쩌면, 과거의 사랑을 잊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실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품어보았다.
그런데, K를 만나기 전날 밤, 그놈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