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평
<결혼 이야기>는 결혼과 함께 경력이 중단된 아름다운 여배우 니콜과 전도유망한 연극연출가 찰리가 이혼을 선택하고 성립하는 과정을 담아낸 영화입니다. 실제로 감독은 배우였던 아내와 이혼한 경험이 있으니 어찌 보면 결혼과 이혼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일종의 회고록인 셈이죠.
대중을 겨냥한 로맨스 영화(의도가 어떻든 결과물로만 보면)의 아이디어를 창작자의 경험에서 가져오는 것은 위험합니다. 본인의 특정한 상황에 얽매여 보편성을 잃고 사적인 감상에 그치기 쉬우니까요. 이혼이라는 불편한 소재를 다룬 거라면 더더욱이나 본인을 변호하고 상대방을 험담하는 교활한 영화로 남을 수도 있고요. 다행히 노아 바움백은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아요. <결혼 이야기>는 관객들이 기대하는 로맨스 영화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합니다.
혹자는 주야장천 이혼하는 모습만 보여주는 영화가 로맨스 장르가 맞냐고 묻겠지만 이런 장르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의 유기체가 태어나고 자라는 이야기가 수도 없이 많은걸 생각하면 사랑이 병들고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보여주는 것도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죠. 게다가 영화를 보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두 캐릭터의 재결합을 바라게 됩니다. 이는 니콜과 찰리가 선량하고 매력적인 사람들인 데다 사랑과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우리와 닮아있기 때문이죠. 기본적으로 영화가 사랑과 결혼에 대해 따스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건 물론이고요.
그렇다면 교양과 재능을 겸비한 두 예술가는 왜 이혼을 선택하는 걸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결혼은 연애가 아닙니다. 결혼과 양육이라는 어른들의 막중한 책임 아래 둘 중 한 명의 희생은 불가피한 거죠. 특히나 그들은 3000마일이나 떨어진 엘에이와 뉴욕에 각각 근거지를 두고 있고 맘만 먹으면 에미상과 맥아더상을 탈 수 있는 유능한 젊은이들이에요. 누구의 희생도 더 가볍고 더 무겁지 않습니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두 사람의 저울을 공평하게 분배합니다.
시작은 니콜이 자기의 커리어를 로맨스에 헌납하지만 애석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애정은 옅어지고 박탈감은 두터워지죠.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헤어지기로 결정해요. 품위 있는 이별을 꿈꾸던 주인공들의 소망은 얼마 안가 지저분한 법정 심판대에 옮겨지고 고결해 보였던 두 사람이 이혼 소송에서 있을 수 있는 부잡스럽고 멜랑꼴리 한 상황들에 내몰리면서 서로를 상처 입히고 치졸한 밑바닥을 드러내게 됩니다. 둘의 제로섬 게임이 소모적이고 안타깝게 보이기도 하지만 잃어버렸던 스스로를 회복하고 관계를 이성적으로 바라보는 데 필요한 수순이기도 해요.
당연히 이제 만들어진 이별과 회한에 관한 영화가 새롭고 특별해지기는 힘들어요. 어떤 영화들은 그런 고루함을 분장시키기 위해 판타스틱한 극적 장치나 현대에서만 할 수 있는 시각효과에서 돌파구를 찾기도 합니다. 예컨대 <이터널 선샤인>이 그랬던 것처럼요. 허나 <결혼 이야기>가 그런 시도를 하는 영화는 아닙니다. 감독은 삼각대를 땅에 두고 두 사람의 어쩔 수 없는 헤어짐을 담담히 따라가죠. 자기 몫이 분명한 장면들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으니 다른 장식 없이도 느슨하지 않게 흐릅니다. 절제된 음악도 효과적이에요. 그 차분한 어조는 영화를 우리의 정서에 빈틈없이 밀착시키면서 현실적인 무게를 증량합니다.
상당 부분 배우에게 빚질 수밖에 없는 영화입니다. 스칼렛 조핸슨과 아담 드라이버의 앙상블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성공적이에요. 이러한 성취는 이들의 연기 수준이 높은 데다가 모든 감정과 대사의 동기가 명확하게 설정된 잘 쓰인 각본 때문입니다. 덕분에 바디슈트와 요부의 가면을 벗은 스칼렛 조핸슨은 어느 때보다도 위엄 있고 아트하우스 영화에서 북유럽 이방인 같기만 하던 아담 드라이버는 지상에 자연스럽게 착지합니다. 로라던을 포함한 조단역들의 귀여운 호연도 빼놓을 수 없고요.
<결혼 이야기>의 미학은 소박하고 통속적인 장르를 철저하고 진지한 예술가가 다룸으로써 탄생합니다. 이 정도로 완성도 높은 멜로드라마는 야심적인 예술영화나 블록버스터만큼이나 큰 영화적 즐거움을 선사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