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중력과 호르몬에 영향을 받지 않아서일까. 그는 자기 이름이 뭐였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떠한 기막힌 영문으로 한 줌 넋이 되어 구천을 떠돌고 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살아생전에도 기억력이 나빴던랬나. 눈을 꼭 감고 머릿속을 떠듬어본다. 나는 울 때 어떤 소리가 났더라. 생일 때는 무슨 케이크를 좋아했더라. 누구와 소원을 빌었더라. 아 어느 누굴 사랑했던가.
다행스럽게도 그는 사랑했던 이들은 대번에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아주 또렷이. 어쩌면 그들에게서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 속 미련한 제비가 된 듯이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창가를 어슬렁거렸다.
만원 버스에 갇혀 출근하는 누구에게 나를 물어볼 수는 없었다. 요 녀석은 아직도 샤워하고 내가 말해준 로션을 제대로 안 바르는군. 내가 그렇게 일러줬는데도 말야. 속이 상했다. 바삐 아기를 돌보는 그녀를 보니 조금 안도를 느꼈다. 붓을 든 정겨운 저님께선 또 무엇을 누구를 그렇게 열렬히 사랑하시는지.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아 마음이 쓰인다. 이젠 아무개 씨가 된 남자애는 배스킨라빈스에서 내가 좋아하던 메뉴는 하나도 고르지 않는 모습에 실망해 다신 찾아가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태연히 텀블러에 소주를 따르는 그 여자애는 발그레한 게 여전히 귀엽고나.
한 때의 여흥에 즐거웠지만 그를 추적할만한 흔적은 하나도 없었다. 인기 시리즈의 다음 막에서 아무런 부연 설명 없이 하차한 삼류 캐릭터처럼 그는 화석 한 조각 남기지 못하고 그대로 매몰된 것이다. 그의 부재는 당연하게도 무심코도 이성적이신 우주의 개연성에 작은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다.
맥이 빠져버린 그는 담배가 한 개비 피우고 싶어졌다. 그러고 보니 놀이터 벤치에 앉아 적막한 새벽을 피우던 그때는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 상관없었던 것 같아. 앉아있는 그에게 갸웃거리던 길고양이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별안간 그 고양이를 한 번도 매만져 본 일이 없다는 게 생각났다. 유령이 되었으니 가까이 가도 좋을까. 괜찮을까. 그는 버릇처럼 멀찍이 돌아 다가갔다. 살포시 놀래키지 않도록. 이윽고 고양이가 그의 기척을 채고 돌아보자 그는 영원히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