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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다영 Oct 13. 2022

너와 내가 만든 가족


  며칠 전 브런치에서 놀라운 글을 읽었다. 은서란 작가의 <친구에서 딸로, 피보다 진한 법적 가족이 되다>라는 제목의 글로, 사십 대 여성인 작가가 다섯 살 어린 친구를 딸로 입양하여 두 사람이 법적으로 가족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생활동반자법이 제정되기를 마냥 기다리다가는 할머니가 될 것 같아 다른 방법을 찾았다고 한다. 그가 찾은 방법은 다름 아닌 성인 입양. 성인을 입양하는 것도 생소했지만 무엇보다 서로의 나이 차가 한 살만 나도 입양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성인 입양은 말 그대로 부모가 될 사람과 자식이 될 사람 모두가 의사 결정권이 있는 성인이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에게 허락을 구하거나 심사를 받을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가장 중요한 당사자 간의 합의와 친부모의 동의만 있으면 신고가 가능하다고 한다. 게다가 입양된다고 해서 친부모와의 관계를 잃는 것도 아니다. 추가로 양부모가 더 생기는 것일 뿐.


  몇 해 전 김하나, 황선우 작가의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읽었을 때도 비슷한 맥락에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전까지 내가 생각했던 가족의 이미지는 결혼한 남녀 또는 남녀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이른바 사회가 규정한 ‘정상가족’ 형태에 한정되어있었다. 어려서부터 학교에서 배우고 미디어를 통해 각인된 가족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나도 어른이 되면 저런 가족을 이루게 되겠구나, 이뤄야 하는구나.’ 생각하게 했다. 성인이 된 후로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내 삶을 어떻게 꾸릴지 고민하는 와중에도 언젠가 좋은 남자를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이뤄야 한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사회가 간주한 답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살기를 선택한다면 삶이 지금보다 더 힘들어질 것만 같았다. 사회에서 인정받거나 적응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고 아직 받아보지는 않았으나 잃을지도 모를 권리와 혜택이 아쉬웠다.


  국어사전에 가족의 의미를 검색해보면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그 구성원.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진다.’라고 나온다. 현행법으로는 이성이든 동성이든 아무리 오래 함께 살아도 결혼하지 않으면 가족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한 집을 공유하고 일상을 함께 나누며 원가족보다 더 친밀하게 삶을 공유하는 사이여도 서로에게 법적인 보호자가 되어줄 수는 없다. 상대가 아프거나 사고를 당했을 때, 의사 결정을 할 수 없을 만큼 위급한 상황 앞에서도 동거인은 그저 법적인 가족이 현장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세상에는 혈연이나 혼인 관계가 아니어도 함께 사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와 공동으로 주거와 생계를 책임지면서 서로로 인해 안정감을 느끼고 각자의 일상을 지키면서 서로를 돌보며 살아간다면 그 관계는 가족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지난날의 내가 ‘정상가족’으로 보이는 가족만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라고 믿지 않았더라면, 더 다양한 형태의 가족 구성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보다 자유롭고 유연하게 삶을 설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그들이 일반적인 가족의 모양이 아닌 다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외롭고 싶지 않아서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과, 편안한 사람과 더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마음 놓고 원하는 사람과 함께 살 수 있다면 좋겠다. 서로를 포용하고 돌보며 고독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너와 내가 만든 모든 가족을 서로가 인정하고 사회가 보호해줄 수 있는 세상이라면 우리는 더 많은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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