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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다영 Dec 09. 2022

겨울


  우리 집 보일러 액정에는 이따금 ‘44’라는 숫자가 뜬다. 내가 “44 떴어!”하고 말하면 남편은 즉시 일 층으로 내려가 건물 뒤편의 보일러실로 향한다. 이 숫자가 뜨면 난방도 온수도 갑자기 작동을 멈추기 때문이다. 검색창에 ‘린나이 보일러 44’를 입력하면 수위 센서에 이상이 생겼다는 답변을 찾을 수 있다. 해결 방법은 전원코드를 뽑았다가 다시 꽂는 것으로, 동일한 증상이 다시 발생하면 서비스 센터에 연락해 점검을 받으라는 안내가 나온다. 남편은 네이버와 유튜브를 열심히 뒤지더니 다행히 어떤 해결책을 찾은 모양이다. 내가 보일러 액정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몇 분 내로 남편에게서 이제 전원을 켜보라는 전화가 온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소리로는 보일러에서 어떤 물을 빼내는 작업을 하는 것 같다. 지금껏 몇 번이나 ‘44’가 떴지만 아직은 남편의 처치만으로 보일러가 정상으로 돌아오곤 했다.


  보통 가스보일러의 안정적인 사용 기간은 7~8년 정도라고 하던데, 우리가 이 집에 이사하던 6년 전에 보일러를 교체했으니 꽤 오래 사용하긴 했다. 요즘 들어 부쩍 ‘44’가 뜨는 횟수가 잦아지는 추세다. 남편 말에 따르면 아무래도 건물 자체가 오래되어 관을 교체해야 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공사가 이만저만 커지는 게 아닐 텐데. 이 추운 겨울에 보일러 없이 며칠을 보내야 하는 일이 생길까 봐 걱정이다.


  지난주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된 것 같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고 있다. 겨울이 되면 침대에서 일어날 때부터 큰 결심이 필요하다. 전기장판은 왜 그렇게나 따듯한지, 한겨울의 이불 속은 정말이지 벗어나기 힘든 천국이다. 날이 추워지면 입을 옷이 많아져 출근 준비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내복을 시작으로 원피스에 두꺼운 니트에 기모 스타킹에 패딩점퍼를 입고 장갑까지 챙겨야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그렇게 껴입어도 현관문을 나설 때면 절로 어깨가 움츠러든다. 차가운 공기는 언제나 매섭게만 느껴진다. 코끝에 닿는 추위가 너무 싫어서 도로 집으로 들어가고만 싶다. 밤새 눈이라도 내린 날이면 출근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집에만 있고 싶다. 따듯한 집안에서 창밖의 새하얀 세상을 눈으로만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평온할까.


  어려서부터 유독 겨울을 싫어했다. 겨울이 오면 잘 자고 일어나도 어쩐지 몸이 무겁게 느껴지고 자주 피로를 느낀다. 아무래도 체온을 유지하느라 에너지를 많이 쓰는 모양이다. 추운 날이면 아무 일 없이도 길을 걷다가 자꾸 눈물을 흘린다. 어릴 적에 친구들이 설마 추워서 우는 거냐고 놀라거나 놀리곤 했던 기억이 난다. 자라면서 그게 안구건조증이라는 걸 알았지만, 추운 게 정말로 슬프기도 했다.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조차 없는 원초적인 공포 앞에서 무력감과 설움이 밀려오곤 했다. 너무 추운 날 바깥에 있어야 할 때나 실내에 들어가서도 추위가 가시지 않아 몸이 덜덜 떨릴 때면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인다. 추위는 나를 해칠 수 있고, 아프게 할 수 있고, 불행하게 할 수 있으니까.


  겨울은 너무 길고 피로하고 두려운 계절이다. 기온이 떨어질수록 세상을 채우고 있던 생기도 조금씩 빠져나가는 것 같다. 공기도 나무도 도로도 건물도 자꾸만 더 진한 회색빛으로 물들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의 표정도 점점 더 딱딱해지는 것 같다. 때로는 잎을 잃고 맨몸이 된 나무들을 보면서 나도 이 추위를 온몸으로 겪게 될까 봐 두려워질 때가 있다. 내게 두꺼운 외투가 없다면, 차가 없다면, 집이 없다면, 집안을 따듯하게 할 수 있는 난방비가 없다면, 나를 따듯하게 보호해주는 것들을 전부 잃으면 나는 과연 살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살아남아 어떤 걸 견디게 될까. 해마다 겨울이 오면 내가 겪어보지 않았던, 겪을 수도 있을 불행에 대해 상상해본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겨울이라는 계절이 아예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겨울이 없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경쾌하고 낭만적일 것만 같은데.


  부디 이 계절이 아무도 걱정시키지 말고, 아무도 해치지 말고 금세 지나가기를 바란다.

  세상이 춥기까지 하면 그건 너무 슬프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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