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이야기를 쓰면 생기는 일

feat.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by 장유록


추석 연휴를 맞아 부모님 댁에 갔더니 (나는 재택근무자이고 자가격리를 마친 후 내려갔다) 엄마가 여기 좀 보라며 박스 하나를 내어주셨다. 꽤 묵직한 박스 속에는 초중고 졸업앨범을 포함한 내 어린 시절 앨범과 잡동사니들이 가득했다. 엄마는 '오다 주웠다'라며 머리핀 하나를 툭 던져주는 무뚝뚝한 남자 친구처럼 약간 쑥스러워하시더니 유유히 사라지셨다. 이제부터 추억여행을 시작해도 좋다는 허가였다. 나는 보물 상자라도 발견한 듯 반가웠다.



자리를 깔고 앉아 어린 시절 사진을 하나 둘 살펴보며 키득키득 웃다가 작은 노트 한 권을 발견했는데, 그 노트의 첫 장에는 '1999. 1. 20'이라는 날짜가 반듯하게 쓰여있었다. 어린 시절 쓰던 일기장이었다. 누가 볼 새라 비밀스럽게 일기를 쓰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은색 펜으로 예쁘게 적어 내려 간 문장들이 빼곡하게 가득 차 있었다. 꽤 괜찮은 문장들도 눈에 띄었다. 초등학생이 썼다고 보기엔 믿어지지 않는 시도 몇 편 적혀 있었다. 어린 시절 강아지를 잃고 슬퍼하던 대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쓰기 싫었던 꼬맹이


어려서부터 글 쓰는 일을 좋아했다.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 배열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새콤한 열무김치'라고 쓰면 입에 침이 고이는 것이 신기했고, '파란 그리움' 같은 알쏭달쏭 한 표현을 써도 괜찮은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 꼬마 작가는 그 후 오랫동안 글쓰기의 즐거움을 잊고 살았지만, 호러소설의 대가 스티븐 킹은 어린 시절 발견한 이 즐거운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50편도 넘는 수많은 베스트셀러 소설을 전 세계인들에게 팔아치우곤, 거기에 대한 보답이라도 하듯 자신이 창작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글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유혹하는 글쓰기(On Wrting)> (스티븐 킹 지음, 김영사)라는 책이다. 이 책을 끼고 다니며 두 번을 읽고 나니 내 안의 꼬마 작가가 빨간색 베레모를 쓰고 볼펜 똥이 가득 묻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오래 말을 하지 않아 잠긴 목을 음, 흠-하고 다듬으며 타박타박 걸어왔다.






꼬마 스티븐 킹이 어릴 때 시작한 창작을 즐겁게 지속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눈부신 재능, 수많은 거절 쪽지에도 굴하지 않았던 의지, 언제나 그를 격려해 준 아내의 사랑 등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이유가 있었지만, 스티븐과 형을 홀로 키우신 어머니의 역할이 무엇보다 컸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어린 스티븐이 즐겨보던 만화를 베껴서 쓴 첫 모방작을 어머니께 내밀었을 때, 어머니는 기왕이면 '너의 이야기'를 써보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엄청난 '가능성'이 내 앞에 펼쳐진 듯 가슴이 벅찼다. 마치 커다란 건물 안에 들어가서 그 수많은 문들을 마음대로 열어보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 문들은 평생토록 열어도
미처 다 열어보지 못할 것 같았다.

<유혹하는 글쓰기> p. 32 스티븐 킹 지음, 김영사






그렇게 허락을 받은 스티븐은 정말 신나게 문을 열어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꼬마 스티븐은 연필로 정성껏 적어 넣은 네 쪽 분량의 이야기를 완성했다. 이번엔 '베끼지' 않은 '자신의 이야기'였다. 어머니께 이 이야기를 건넸을 때, 어머니는 핸드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거실에 앉아 당장 그 자리에서 읽으셨다고 한다. 떨리는 마음으로 첫 독자의 반응을 살피던 스티븐은 어머니가 '웃어야 할 장면에서는 틀림없이 웃으셨다.'라고 회상한다. 다 읽으신 후에는 '책으로 내도 될 만큼 훌륭하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말은 지금껏 어느 누구에게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유혹하는 글쓰기> p.32 스티븐 킹 지음, 김영사





그 후로 어린 스티븐은 정말 책을 내려는 듯 이야기를 네 편 더 썼고, 그의 어머니는 이야기가 완성될 때마다 그에게 25센트짜리 동전 하나를 주셨다. 네 편의 이야기. 편당 25센트. 그것은 어린 스티븐이 글쓰기로 벌어들인 최초의 1달러였다.





만약 그때 스티븐의 어머니께서 '이런 허섭스레기 같은 일은 그만하고 공부나 하라.'라고 하셨다면 이 소설가의 이야기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25센트 대신 '너는 왜 이렇게 이상한 생각을 하니?'라고 쓰인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면? 이 이야기는 달라졌을까? 이 성공한 소설가의 어머니는 이 작은 재능의 싹이 엄청난 베스트셀러를 쏟아내며 전 세계인들을 매료시키는 커다란 나무가 될 것이라고까지는 생각지 못하셨겠지만, 이 싹을 소중하게 지켜주셨다.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느라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던 시절이었지만, '기술이나 배우라.'라며 자신의 불안을 아이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이 아이가 즐겁게 할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른다. 꼬마 작가는 운이 좋았다. 어머니의 응원과 25센트가 없었어도 어떻게든 글을 써나갈 수 있었겠지만, 이렇게 즐거움에 가득 차서 '글쓰기에 대한 글'까지 쓰는 작가가 되지는 못했을 것 같다.






나의 어머니께서 어린 딸의 일기장을 읽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동문학가셨던 4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이 아이의 글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셔도 어떻게 지원해 주어야 할지 모르셨다.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믿으셨다. 나는 그 사랑과 희생을 먹으며 열심히 배웠다. 내 살과 뼈가 엄마의 노동이라는 사실이 가슴이 아프고 배움이 무거웠다. 글쓰기의 즐거움은 썰물처럼 뒤로 또 나중으로 밀려났다. 긴 시간을 건너서 다시 밀물처럼 돌아와 어린 나의 일기장 앞에 선 지금. 나는 지금 내 나이와 비슷했을 나의 곱고 고되었던 어머니를 대신해 나에게 '쓰고 싶은 것을 마음껏 쓰라'는 허가증을 내어주었다. 글 한편을 쓸 때마다 2500원짜리 월드콘을 하나씩 사 먹으며 잘했다고 말해주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아이를 언젠가 만난다면 '뜬구름 잡는 소리 하지 말라.'는 말 대신, 너의 그 즐거운 뜬구름을 솜사탕처럼 살살 녹여먹으라며 용돈을 쥐여주고 싶다.


꼭 그런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




글쓰기에 대한 즐거움을 살며시 키워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기꺼운 마음으로 추천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