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에서 한 달 살기 시이-작
뒤돌아보면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있다. 대부분을 망각하며 살아가면서도 조각처럼 새겨진 기억들이 있다. 이제는 이런 경험치들이 쌓여 '아, 지금 이 순간은 평생 기억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경험 속에 존재할 때도 있다. 내 머릿속 외장하드에 남겨진 기억의 카테고리를 살펴보니 이런 기억은 꽤 오래 저장되더라, 이런 류의 데이터가 쌓인 것이지.
이렇게 남겨진 기억들을 되짚어보고 있노라면, 내 일상을 괴롭히던 크고 작은 고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고마운 깨달음을 얻은 때가 언제였는 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뒤로는 '하루하루는 고민 없이 살고, 남기고 싶은 일은 기록하고, 기록하지 않아도 평생 기억에 남을만한 일을 할 기회가 오면 주저하지 말고 하자'는 주의로 바뀌었다.
목표나 계획도 이제는 잘 세우지 않는다. 모두에게 목표가 쓸모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후 '목표 세우기' 강박에서 혼자 스르르 나와 비로소 편해질 수 있었다. 나의 경우엔 목표가 꼭 인생의 '스포일러' 같아서 목표를 이루려고 달려 나가는 삶이 재미가 없다. 목표만 세우면 하고 싶던 것들도 하기 싫어지는 청개구리인걸. 워낙 '목표를 세우고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라는 사고방식이 뿌리 깊게 박힌 사회에서 나고 자라서 그런지 이 프레임에서 나오는 것이 가장 어려웠었다.
목표 대신 큰 방향성만 느슨하게 정해놓고 내가 좋아하는 습관 몇 가지를 일상 속에 끼워 넣은 뒤, 인생이 주는 것들을 그때그때 즐겁게 하고 있다.
이렇게 살다 보니 내게 '남해'가 왔고,
그래서 남해로 갔다.
우연히 남해에서 한 달을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왔고, 못 갈 것 없는 상황이었고, 날씨가 좋았고, 나중에 뒤돌아봤을 때 2020년에 남해에 와서 모르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한 달을 살았다는 기억은 절대로 잊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 가보는 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 열네 명과 가늘던 달이 가득 차올랐다가 다시 기울 때까지의 기간을 함께 보내는 일은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 일일 것이다. 서울에서 남해로 내려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이런 다소 기이한? 일을 시도한 사람들을 잔뜩 만난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꽤나 흥분되었었다. 그리고 그 신기한 사람들? 과 실컷 남해를 즐기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모든 기억이 꿈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래서 거품처럼 사라져 내릴까 봐 무섭기도 한, 알 수 없는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모든 기억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뼈대만 남고 아스라이 부스러져갈 아름다운 기억들이 흩어지기 전에 이곳에 남겨보려고 한다.
부디 누군가에게도 이 이야기가 남해처럼 아름다울 수 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