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자의정 충전 프로젝트
조만간 같이 밥 먹자 (2024)
3학년이 시작됐을 때, 그 친구가 왔다. 다른 학교에 다니다가 편입을 했단다. 친구가 오기 딱 1년 전, 나도 처음으로 회화과 수업을 들었다. 디자인과에서 전과를 해온 것이다. 처음 수업을 듣던 날, 얼마나 설레고 떨리던지. 나는 가장 아끼는 옷을 입고 학교에 갔다. 전공 시간에 원형으로 둘러앉아 자기소개를 했다. 내 차례는 가장 마지막이었는데 내가 말하면서도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나 들어온 나의 친구는 나와 다르게 밝고, 에너지 넘치는 인사를 남겼다. 큰 목소리와 환하게 웃는 얼굴, 큰 제스처가 인상 깊었다. 재밌는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 친구도 디자인과에서 편입을 해왔다고 했다. 알게 모르게 동질감을 느꼈다. 전과한 이후, 조용히 동기들 사이에 스며들어 있었던 나와 다르게, 친구는 여기저기를 휩쓸고 다녔다. 모르는 게 생기면 쭈뼛거리면서 주변을 조용히 둘러보던 나와 달랐다. 그 녀석은 모르는 게 생길 때마다 옆자리 친구, 그 옆자리, 반대편 자리에 있던 나에게까지 와서 서슴없이 물어봤다. 캔버스는 어떻게 짜는 거야? 젯소는 어떻게 칠하는 게 좋을까? 이건 뭐야? 이건 어떻게 하는 거야? 나는 그런 친구가 신기했다. 어떻게 저렇게 사람을 어려움 없이 대할까. 그리고 나와는 친구가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했다. 저렇게 나부대고 시끄러운 녀석은 질색이다.
어느 날의 점심시간. 나는 친한 언니와 컵밥을 하나씩 사들고 실기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그 녀석이 혼자 밥을 사 들고 지나가는 걸 마주쳤다. 어디가? 어~ 밥 먹으려고. 우리도 마침 밥을 먹으려던 참이었지만 함께 먹진 않았다. 맛있게 먹어~, 그러곤 슬그머니 헤어져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나는 낯선 사람과 밥을 먹는 것을 싫어했다. 예민했던 내게 그 친구와 나는 아직 밥을 같이 먹을 사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밥 먹으면서 나부댈 것을 생각만 해도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날의 수업을 마치고, 저녁 시간까지 더 그림을 그리던 나는 해가 다 떨어지고서도 한참을 지나서야 실기실에서 나왔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컴컴한 벤치에 앉아 가로등 불빛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물끄러미 보고 앉아서 담배를 한대 피우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이제 집으로 가야 한다. 미대 앞의 좁은 길을 따라 나와서 버스 정류장이 하나 있었고, 나는 그 앞의 횡단보도에서 반대편으로 건너 골목으로 들어가야 했다. 신호를 기다리며 서서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눈으로 발아래 좁은 네모 칸을 그리고 그 안을 서성거렸다. 안절부절못하다가 오른발을 네모 칸 바깥에 걸쳐 디뎠을 때 무언가 밟혔다. 작은 스프링 노트였다. 상체를 숙여 그 노트를 주웠을 때, 신호가 바뀌고, 홀린 듯 횡단보도 위를 걸으면서 노트를 펼쳤다. 누군가의 일기였다.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름도, 연락처도 없었다.
집에 돌아와 익숙하게 횡단보도를 건너 집에 돌아오던 내 다리처럼, 깊은 생각 없이 홀린 것처럼 일기를 끝까지 읽었다. 이 사람 악필이다. 나는 몇 번씩 같은 글자를 반복해서 읽어야 했다. 사실 읽었어도 내가 제대로 읽은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리고 곧 마음이 불편해졌다. 얼핏 얼핏 알아본 글자들은 너무 외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나는 누군가의 마음을 멋대로 읽어 놓고 위로 한 번 전하지 못한다는 게 내심 마음이 쓰였다. 사실은 멋대로 읽은 것부터 잘못이라고 생각해서 더 마음이 불편했다. 한참 동안 노트의 표지와 스프링을 만지작거리다가 나는 책장의 한 칸에 그 일기장을 밀어 넣었다. 나의 일기들이 모여 있는 칸이었다. 나의 외로움들과 함께 여기서 지낸다면 이 작은 녀석의 외로움이 덜해지지 않을까?
수업을 하면서 나는 점점 더 그 친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조용히 그림을 그리던 나와 다르게 친구는 캔버스 위에 라면을 붙였고, 어느 날은 거칠게 물감을 뿌리고, 어느 날은 작업에 쓸 거라며 목장갑을 자르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내가 보는 그 친구는 신기한 사람이었다. 그림을 발표할 때도, 나는 단정하게 옷을 입고 나와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고, 그 친구는 작업복 차림으로 방방 뛰며 발표를 했다. 쟤는 왜 이렇게 에너지가 넘치지? 어디서 저런 에너지가 나오는 걸까? 나는 그 친구에게 에너자의정이라는 별명을 붙여 줬다. 의정인 그 친구의 이름이다. 그리고 나는 에너자의정의 아래에 있는 어떤 마음들을 자꾸만 혼자서 헤집어 봤다. 그녀의 그림을 보면 그런 게 느껴졌다. 나는 일부러 자리를 옆자리로 옮기고, 일부러 집에서 간식을 챙겨 가서 나눠 주고, 자리를 서성거리면서 그녀가 그린 그림에 대해 자꾸만 물어봤다. 친구가 되려고 작정을 한 것이다. 대체로 먼저 친구들에게 다가가지 않는 편이었던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유일하게 먼저 다가가 친구가 된 사람이 의정이다. 물론 의정이는 이 사실을 졸업을 하고 몇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졸업을 하고 의정과 나는 오랫동안 프로젝트를 함께 했다. 기억에 대한 작업을 하고 있던 내가 제안한 프로젝트로 서로의 기억을 의도적으로 나누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각각 한 시간씩 자신의 이야기를 했고, 그 모든 걸 녹음했다. 우리는 점점 더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그 시간에 대해 각자 노트를 적었다. 우리의 노트는 나의 일기들이 모여있는 책장에 차곡차곡 쌓였다. 우리는 그 노트를 서로 바꿔 읽곤 했는데, 나는 의정이의 글씨를 알아보는 게 정말 힘들었다. 나는 자주 놀리듯이 글씨에 대해 얘기했다. 너는 알아봐? 나도 잘 못 알아볼 때가 많아. 그럼 왜 쓰는 거야. 맥락으로 알아보곤 해. 사실 글씨가 중요하진 않았다. 정말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프로젝트를 빌미로 내가 몰래 훔쳐보곤 했던 의정이의 마음이 나와 닿기를 원했다. 내가 훔쳐본 에너자의정의 어떤 면을 위로해 주고 싶어서.
그로부터 몇 년이 더 지나 어느 해의 겨울에, 나는 의정이를 서울까지 불러 앉혀 놓고, 죽으려고 했다는 말을 털어놓았다. 너에게 이 말을 하는 건, 그러지 않겠다고 마음을 고쳐 먹었기 때문이야, 라면서 의정이에게 무거운 마음을 올려 두었다. 의정이는 무거운 내색 없이 내 마음을 들어줬다. 에너자의정은 그런 힘이 있는 친구였다. 나에게 의정이는 에너지였다. 멋대로 마음을 훔쳐보고 위로를 하려고 했던 나는 의정이에게 힘을 빌려 살았다.
올해는 의정이를 처음 만난 때로부터 10년을 넘어서는 해다. 나는 여전히 그녀의 글씨를 제대로 읽지 못하더라도, 나는 그게 무슨 글자인지 알게 되었다. 멋대로 읽어 보았던 오래된 일기장에서 그녀를 찾는다. 글자를 읽으려 하다간 이게 무슨 소리야,라고 하게 된다. 대신에 나는 의정이라면 이렇게 썼을 것 같아, 으음, 맥락을 보니 맞는 것 같군, 하고 마음을 따라간다.
10년 전으로 다시 돌아가도 나는 너와 친구가 될 거야. 또다시 일부러 자리를 옮기고, 일부러 간식을 가져가서 나눠 줄 거야. 너무나 달랐던 우리가 마음을 아는 사이가 되어서 좋아. 조만간 같이 밥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