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진짜 (2024)
저녁 시간이 넘어서야 밖으로 나왔다. 5분이면 가는 자주 가던 카페에 갈지 15분 정도 걸어가야 하는 카페에 갈지 고민을 하면서 횡단보도에 서있었다. 가까운 카페에 가기 위해서는 서있는 교차로에서 횡단보도 두 개를 건너면 있었고, 15분 걸어 나오는 카페는 이대로 하나만 건너서 직진만 하면 도착할 수 있었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자동차 여러 대가 줄지어 나타났다가 줄지어 사라졌다. 많이 춥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잠깐 핸드폰을 보는 사이에 손 끝이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의미 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중에 신호가 바뀌었다. 그대로 핸드폰을 쥐고 걷기 시작했다. 어느 카페에 갈 것인지 결정을 하기도 전에 가까이에 있는 카페 쪽의 횡단보도를 그냥 지나쳤다. 아마도 결정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발이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냥 발을 따라가기로 했다.
오늘 어떤 하루를 보내셨나요? 열심히 발을 구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오, 늘, 어, 떤, 하, 루,를, 보, 내, 셨, 나, 요,? 내 한 발 한 발에 맞춰서 글자가 하나씩 내 등 뒤로 떨어져 나갔다. 어떤 모양으로 떨어졌을지 궁금했지만 굳이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다시 주워 담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였다. 나는 대신에 당신이 오늘 어떤 하루를 보냈을지 상상했다. 지하철에 서있는 당신을 상상했다가 이윽고 도착해서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려 했는데 그쪽으로는 도통 들은 얘기가 없어서 상상하기가 쉽지 않았다.
중간 지점에 있는 횡단보도에 다시 섰다. 내 옆으로 나보다 조금 덩치가 작은 여자가 나를 따라 멈춰 섰다. 조금 전에 내가 앞질러 온 사람이었다. 나는 가끔 앞에 가는 사람을 혼자 의식하면서 누가 먼저 갈지 시합을 하곤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발이 자꾸 빨라진다. 그렇게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 앞질러 왔지만 지금 같은 횡단보도에 서 있다. 점심은 뭐 드셨어요? 저녁은? 일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포기하고, 어떤 메뉴를 먹었을지 상상하기로 했다. 아직 핸드폰은 오른손에 쥐어져 있었다. 손 시려,라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핸드폰을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그때 당신의 점심 메뉴에 대한 궁금증도 주머니에 같이 찔러 넣었다. 너무 뜬금없고도 의미 없는 질문이다. 그건 너무 진부하잖아. 사실 진부하고 뭐고 그런 것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게 가짜 궁금증이라는 것이다. 그냥 당신에게 뭐라도 말을 걸고 싶은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어서 끄집어낸 가짜 궁금증.
나는 당신에게 자꾸 가짜를 보여주곤 한다. 진짜를 숨기기 위한 가짜. 진짜와 오묘하게 섞여있는 가짜를 당신은 알고 있을까? 가방을 메고 있는 오른쪽 어깨가 뻐근해서 가방을 한 번 들었다 놓으면서 어깨를 살짝 움직였다. 신호가 다시 바뀌고 내가 앞질렀던 그 여자는 어느덧 사라지고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잠깐 당신 생각을 하는 사이에 발걸음을 겨룰 사람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사실을 깨닫고 주머니 속에 있는 당신의 뭔지 모를 점심과 저녁을 손가락으로 데굴데굴 굴렸다. 어쩌면 가짜를 알기도 전에 당신이 이미 진짜를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면서 몸을 살짝 떨었다. 밥이 궁금하진 않아요. 당신이 궁금하니까 밥이 궁금한 거겠죠.
아무래도 밥이 만만한가,라고 생각하면서 어느덧 카페 앞에 도착했다. 카페에 들어오기 전에 고개를 돌려 내 발 뒤쪽을 한 번 흘겨봤다. 아무것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테이블에 앉아 디카페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서 어떤 걸 떠올렸다. 진짜를 숨겨야 하기 때문에 무엇을 떠올린 것인지는 나만 아는 비밀로 남기기로 했다. 당신의 식사 메뉴는 가짜, 가짜,라고 외치면서 주머니 속에서 녹아 사라졌다. 가짜, 가짜. 아메리카노와 함께 떠오른 진짜를 손바닥에 올려 꽉 쥐었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