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옐로우 (2024)

한계

by 김민주

레몬 옐로우 (2024)


0 DAY

엄마와 동생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방안에 있던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에 드러누워서 문틈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엿듣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침대의 계단을 한 칸 한 칸 따라 내려갔다. 이 침대를 쓴 지 벌써 반년이 넘었는데도,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벌벌 떤다.


이사를 좀 더 있다가 할까 봐. 지금 졸작 때문에 정신이 없어. 이사까지 하면 너무 힘들 것 같아.

그래, 졸전 준비만 하고 바로 이사하는 건 어때? 괜찮지?


동생과 엄마가 나를 보면서 한 마디씩 던졌다. 나는 한참 동안 입을 움찔거리기만 하다가 겨우 몇 글자를 꺼냈다.


아니, 근데 나는.


그리고 말을 끝맺기 전에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게 느껴졌다. 머리가 새하얘진다.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숨을 쉬는 게 힘들다. 죽을 것 같다. 죽으면 어떡하지?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럼 모든 게 다 끝나는 걸까? 그럼 괜찮아질까?


-1

집에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처음 보는 제목의 노래들을 아무렇게나 담아놓고 이어폰을 귀에 꽂아 넣었다.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노래도 듣고 있지 않았다. 책상에 걸어놓은 조명을 빼고 나머지는 모두 검은색이었다. 갑자기 귓속으로 노래가 꽂혀 들어왔다. 그게 괴로워서 책상 위로 머리를 쿵 찧었다.


-2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요즘 내가 이 시간마다 하는 일이다. 오늘은 달이 떠있지 않았다. 한동안 하늘을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앞에 있던 계단을 두 칸 따라 내려가서 털썩 앉았다. 계단을 따라 시선을 아래로 아래로 내리다 보면 농구 코트가 있었다. 오늘은 그곳에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대신 눈이 가득 쌓여 있었다.


-3

물이 점점 탁해졌다. 너무 작은 물통을 쓰는 걸까? 레몬 옐로우, 울트라 마린, 반다이크 브라운, 올리브 그린, 뭐 어쩌구 저쩌구, 아무튼 간에 물감을 쓰다 보면 물은 탁해지기 마련이다. 밝은 노란색을 칠하고 싶어서 레몬 옐로우를 찍어 팔레트에 펴 발랐지만 내가 생각한 색이 나오지 않았다. 물을 바꿔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일어나는 게 귀찮아서 노란색을 칠하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색을 골라 칠했다.


-4

오늘도 도서관에 있다가 시간에 맞춰 출근을 했다. 여기서 일한 지 벌써 1년이 넘었지만, 피크 타임엔 여전히 정신이 없고 힘들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저녁 시간이 지나고 7-9시가 가장 바쁜 시간이었다. 들어온 주문을 확인하고, 주문에 맞춰서 그릇을 하나 집어 들었다. 얼음을 퍼담고, 연유를 주욱 뿌린다. 딸기를 한 움큼 집어넣었다. 처음엔 모두 저울질을 해서 그램수를 맞췄지만, 이제 웬만하면 저울에 달지 않아도 맞출 수 있게 되었다. 다시 얼음을 동그랗게 올리고, 연유, 채 썬 딸기를 겉면에 올린다. 어떤 빙수냐에 따라서 위에 치즈케이크를 올리기도 하고 찹쌀떡을 올리기도 했다. 이렇게 바쁜 시간에는 나만 바쁜 게 아니라서 더더욱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가던 중에 설거지통에 가득 차 있는 그릇들이 보였다.


저 설거지할게요!


그리고 설거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릇 하나가 내 손을 벗어나 떨어졌다. 도기 그릇이었다. 박살이 난 그릇을 다시 집어 올렸다. 사장님은 다치진 않았냐, 묻곤 한쪽에 잘 두라고 일러주셨다. 네, 죄송합니다, 그리고 한쪽에 가지런히 조각들을 모아서 올려뒀다. 이어서 설거지를 하는 중에 손이 자꾸 젖어서 고무장갑이 찢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손이 자꾸 따끔거려 가로등불에 비춰보니 아주 조그만 상처가 나있었다.


-5

12시쯤 빙수집 알바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뽀송한 이불에서 자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이불을 둘둘 말아 챙겨서 세탁방에 갔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집 앞 골목에서 치한을 만났다. 오토바이 한 대가 골목 앞에 서 있었다. 앞집에 배달을 왔나? 생각하면서 지나쳐 갔는데 나를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이거 이상한데? 너무 내 뒤에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숨소리도 이상했다. 정면을 주시하며 세 걸음 정도 더 걸어 나갔다. 이건 안 되겠다. 이대로 들어가면 바로 우리 집이고, 막다른 골목이다. 여긴 가로등도 없다. 나는 한순간에 뒤를 돌아 골목 밖으로 뛰쳐나갔다. 도망을 가면서 열려 있던 내 가방에서 텀블러와 수첩, 잡동사니 같은 것들이 데굴데굴 구르며 내리막길 아래로 내려가는 걸 봤다. 골목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방금까지 바지를 내리고 험한 짓을 하던 인간이 오토바이를 타고 내 앞으로 쏜살같이 지나갔다.

자주 가던 편의점으로 이불을 끌어안고 들어가서는 사장니임, 하면서 울었다. 사장님이 편의점 문을 걸어 잠그고 집 앞 골목까지 바래다주셨다. 집에 들어와서 112에 문자를 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고, 순찰을 돌았지만 아무도 없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보송해진 이불을 침대에 다시 깔고 누웠다. 잠이 오질 않았다.


-6

엄마랑 전화를 하는데 엄마가 그런 말을 했다. 너 곧 서른이잖아. 금방 서른 돼. 27살은 뭐, 그냥 서른인가 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래그래 하고 대답했다. 엄마는 내가 좀 더 번듯한 뭔가를 하길 바란다. 나는 지금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엄마 생각엔 그렇지 않은가 보다.

조금 뒤면 빙수집 아르바이트를 갈 시간이다. 나는 공부하던 것을 탁탁 접어서 가방에 밀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이 추울 것을 염려해 겉옷의 지퍼까지 올려 잠갔다.


-7

오후 1시에 돈부리집 알바를 마치고 퇴근하려고 하는데, 사장님이 밥을 해주신다고 해서 밥을 먹고 나왔다. 지난달 월급이 아직도 들어오지 않았다. 같이 일하는 알바생이 옆에서 밥을 먹으면서 나에게 누나,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요?라고 물었다. 몰라, 자꾸 살이 빠져. 그리고 잘 먹었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나와서 기름 냄새를 풀풀 풍기는 채로 도서관에 갔다.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가방에서 주섬주섬 약을 꺼내서 밖으로 나왔다. 공기가 차다. 셔츠자락을 여미면서 정수기로 향했다. 텀블러에 대충 물을 담아서 약을 삼켰다. 요즘은 자꾸 머리가 아프다. 뭔가를 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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