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 피해(2026)

by 김민주

1.

얕은 구멍을 판다. 안전하게 내가 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이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며 혹여 나도 모르는 새에 이 자리를 벗어날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다. 나의 범위를 확정시켜 놓는 것은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곳에서 깨어날 때에 다시 나의 구멍을 파기 위해선 처음부터 깊은 자리를 파선 안된다. 구멍을 파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힘을 소모하니까, 깊은 구멍을 다시 파는 것은 싫다. 그 와중에 구멍을 도는 이유는 그것이 나로 하여금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믿음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게, 얕은 구멍 하나 덜렁 파놓고 가만히 서있을 것을 상상해 보면 벌써 무력하고 기운이 빠진다. 게다가 그것을 본 누구라도 내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한다. 구멍도 얕으니 그것마저 하지 못한다면, 나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지금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며, '지금부터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을 들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나는 이 얕은 구멍에서 돌고 있었고, 돌고 있고, 돌 것이다.


2.

나는 아주 많은 것을 상상 속에 넣어 놓는다. 상상 안에서는 뭐든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다. 내가 글을 쓰는 동안에 비가 급격하게 많이 쏟아지기 시작해 이 근방이 물에 잠기고, 여기 있는 8명이 밤새 이곳에 갇히는 것. 혹은 반대로 언제 비가 왔냐는 듯 금세 비가 그치고 바닥의 물도 마르면서, 여기 있는 8명 중 누구도 오늘 비가 왔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여 이곳에 8개의 우산이 남겨지는 것. 둘 중 어느 것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둘 중 무엇이 우리를 덮치게 될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벌어질 가능성과 벌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모두 열려 있다는 것은 내가 끊임없이 이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든다. 끊임없는 장대비가 내리는 가운데 기어코 집에 가겠다고 밖으로 나온 내가 빗줄기가 만든 물살에 슬리퍼 두 짝을 모두 잃고, 4개월 배운 수영 실력으로 겨우 겨우 집에 가는 상상. 그리고 그 상상 안에는 열심히 헤엄치며 '수영 배우길 잘했다'라고 생각하는 나도 있고, 물살이 빨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여 '실전 수영은 다르구나'라고 생각하는 나도 있다. 그리고 그 바깥에는 비는 줄기차게 내리더라도 다행히 물에 잠길 정도는 아니었기에 별 탈 없이 집에 도착해서 '오늘의 상상도 결국 일어나지 않았군'하며 안심하고 잠드는 나도 있는데, 잠든 후 꿈에서 불어난 빗물을 창 너머로 바라보면서 허망한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 이처럼 끝이 나지 않는 상상 속에서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알 수가 없고, 그 모든 가능성의 가능성 안에서 흘러가는 무력감과 흘러가지 않는 희망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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