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6살 무렵까지 경증 자폐 증상을 앓았다.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어디에 있어도 모서리에 박혀서 사람들과 어떤 교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래들이 좋아하는 로보트나 만화에도 별 흥미를 느끼지 않았고, 0부터 99가 적힌 숫자카드들만 만지작 거리며 종일을 보냈다고 한다. 걸음도 남들보다 두 배쯤 느렸고, 말은 더더욱 더뎠다.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은 또래의 그것과는 비교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눌했다.
내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봐도 어머니의 증언과 얼추 들어맞는다. 카드 꾸러미가 들어있는 가방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에 떨며 하염없이 울었고, 사람의 인기척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며, 적막 속에서 카드와 노는 게 즐거움이었다. 머릿속엔 한글로 된 완전한 문장들이 있었고, 읽는 법도 다 알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유치원 시절 친구들은 구석에만 웅크리는 나를 보며 손가락질하고 발로 차대며 놀리기도 했다. 어린 나는 적어도 또래와 내가 전혀 다른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만 인식할 뿐이었다.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있었지만, 공감할 수 없었고 끼어들 틈도 없었다. 나는 그저 내 머릿속을 떠도는 100개의 숫자들과 교감하면 될 뿐이었다.
그런 내가 그나마 교감하던 사람은 외할머니 었다. 할머니가 손을 내밀면 나는 그 손을 잡았고 할머니가 밖으로 나가자고 하시면 나는 곧장 대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선릉역 지하철 2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보이는 슈퍼마켓에서 어김없이 사주시던 파인애플 샌드, 그리고 옆 모퉁이에서 큰 천을 펴고 나물 장사를 시작하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할머니는 6살 무렵 급작스럽게 내 곁을 떠나셨다. 평소에 하지도 않으시던 새빨간 입술 화장을 하시고는 친구를 만나야 한다며 나를 집에 두고 집을 나가셨다. 반나절 뒤 돌아온 것은 할머니의 귀가를 알리는 발소리가 아니라 전화벨 소리였다. 어머니는 수화기를 드시고 몇 마디를 던지시고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셨다. 할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나도 엄마 따라 같이 묻힐 거야!"
할머니가 누워계신 관이 땅에 묻힐 무렵 울려 퍼진 엄마의 울부짖음에, 나는 곧장 달려가 가지 말라며 엄마의 다리를 뒤에서 꽉 끌어안았다. 가족들의 기억에 의하면 정확히 그 날부터 내 어눌했던 표정도, 교감을 거부하던 폐쇄적 성향도, 적막 중 숫자카드를 좋아하던 생활패턴도 서서히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신 엄마 곁에서 함께 티브이를 보고, 엄마가 울면 뒤에서 안아드리고, 엄마가 잠시 집을 비우시면 쌓여있는 설거지를 하는 성실한 아들이 되어 갔다. 급작스런 상실의 충격이 되려 마음의 폐쇄를 뚫고 가족의 슬픔을 응시하게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성인이 될 무렵부터 내 몸이 스멀스멀 과거 지폐의 흔적을 기억해내기 시작했다.
카페나 PC방에 가도 구석을 찾는다.
볕 드는 곳보다는 어둡고 습한 곳이 좋다.
거울을 보면 과거 자폐 증상을 앓았을 때의 표정이 드러날 때가 있다.
종종 타인이 내게 던진 아주 쉬운 말들이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표정을 구긴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눈알이 지끈 아프고 울렁거려, 재빨리 화장실로 들어가 숨을 고른다.
사회적으로 겪는 불편감도 있지만, 그보다 나를 더 압도하는 건 더욱 짙어지는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때 그 선릉역, 파인애플 샌드, 흐르는 땀을 닦아가며 나물을 파시던 모습, 어눌한 나를 예뻐해 어쩔 줄 몰라하시던 할머니의 눈빛.
자폐 증상을 앓던 내가 받았던 사랑의 온기가 그리웠나 보다. 그래서 다시 몸으로 앓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