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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배우 May 15. 2019

5. 18

용서, 존중, 용서받지 못한 자, 용서하지 못한 자

 1980년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었다. 그리고 그해 5월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내 나이 17살 고등학교에 가서 역사 선생님이 보여주신 한 편의 오래 된 다큐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린 시절 기억이 있던 시절에 5월의 광주는 뭔가 무겁고 분주하고 어지러웠다.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시내를 뒤덮는 날이 많았다. 버스를 타면 내가 가고 싶은 위치로 못 가는 경우도 많아졌다. 도로를 통제하고 대학생들을 데모를 했다. 창문을 열고 버스를 타다가 멀리서 날아온 최루탄 냄새에 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그 당시 이모네 집은 전남대학교 정문 근처여서 집에서 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날아오곤 했다.

 처음 5. 18의 실상을 접하고는 실제로 가능하지 않은 일 같아서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오래된 필름 속에서 내가 알고 있는 그곳 친구들과 우정과 추억을 쌓던 그곳에서 총성이 오가는 비참하고 통탄한 일들이 일어나는 장면을 보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대학생(전남대학교)이 되고 난 후에 선배들과의 술자리와 함께 농촌봉사활동을 다니며 듣게 된 진상과 아직 남아있는 그날의 상처는 더 내 마음을 깊게 후벼 파며 들어왔다. 그랬다 나에게 5월은 감사의 달 가정의 달이 아니라 죽음의 달이었던 것 같다. 마치 즐겁고 행복하면 안 되는 것처럼 무겁게 내리누르는 역사의 슬픔을 감당해야 하는 아픔의 시간...

 가해자가 누구인지도 명백하고 피해자도 있으나 사회는 가해자에게는 면죄부를 피해자에게는 위로가 오지 않았기에 그들 안에 자리 잡은 깊은 분노의 상처는 흐려졌으나 에너지는 뚜렷하게 남아 피해자 자신의 삶을 갈아먹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고민들이 어쩌면 내가 만들고 했던 연극 속에 그대로 남아 어렵고 어둡고 아픔을 후벼 파는 연극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반대로 매번 작품마다 갈등이 생기면 빠르게 없는 것처럼 덮어버리거나 해결하고 넘어가버리려는 내 성향은 여기에서 발원된 것인지도 모른다.

 

 얼마 전 미국 정보요원이었던 김용장 씨의 인터뷰를 보며 시청 앞 광장의 총격의 진상이 드디어 드러나는 것 같았다. 대학생들의 데모로 시작된 민주화 물결이 공수부대의 과아아아아아아잉진압으로 시민들도 함께 합세하게 되고 낮에 버스와 택시가 라이트를 켜고 달리는 것으로 광주시민들의 의지를 전하는 평화시위가 시청 앞 광장에서 벌어졌고 그것을 진압하러 장갑차와 군인들이 들이닥쳤고 그곳에 애국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애국가에 반응한 시민들은 가슴에 손을 올리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다. 그리고 애국가가 끝 이날 때 군인들의 발포가 시작되었다. 무장하지 않은 시민들을 향한 발포였다. 전시상황이라고 해도 민간인을 향한 발포는 처벌받는다. 물론 전쟁 중 숫한 민간이 이 죽었지만 밝힐 수없어 넘어간 일들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인을 향한 발포는 분명한 중범죄에 해당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간첩이 시민들 사이에 섞여있었다고 하더라도 장갑차를 동원한 선제공격은 분명한 잘못이다.


 어쨌든... 위의 이야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쓴 건 직접 당사자가 아니었던 나의 분노도 이렇게 큰데 직접 당사자와 가족을 잃은 자들의 마음의 상처 그리고 위로받지 못한 슬픔의 크기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 배우로서 이해해보려 해도 그 크기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감히 위로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이다.


 그런데 슬픈 건 아직도 그 가해자들과 그들의 부역자들은 그들의 아픔을 조롱하고 비판한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사과도 가해자의 인정도 어느 것 하나 이뤄진 게 없는데 정치 프레임으로 그들을 향해 비판하고 왜곡하고 마치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그만하라고 하는 것처럼 그만하라고 한다. 내 세금을 축내는 세금도둑인 것처럼 몰아붙인다.

 



 그러나 요즘 나에게 삶의 가르침이 부어지고 있는 데 그것은 바로 존중의 문화가 가져다주는 이익이다. 존경할 만한 사람을 존중하고 그 마음을 표현하고 흘려보내는 것이 주는 이익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마치 우리가 성공한 자들에게 성공의 비법을 배우고 싶어 하지만 그 비밀한 비법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은 많은 않은 비밀이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복잡한 이야기는 다음을 빌어하기로 하고 간단하게 이야기해보자.

 결국 나는 무언가 배우기 위해서 그것인 진짜인지 검증하고 진짜 같으면 배우려고 하지만 진짜 정수는 이론으로 설명되는 책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태도와 정신 말과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훨씬 더 큰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식의 저주에 갇혀서 마치 책을 읽는 것으로 그의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다. 진짜 그에게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그를 향한 존경과 존중이 수반되어야 한다. 마음뿐이 아니라 정말 내 마음을 담을 수 있는 표현이 수반된 존중이 필요하다.

 

 복잡하게 이야기했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것이다.


 5. 18의 아픔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전두환이라는 명령권자와 그 명령에 의해서 짓밟힌 사람들 사이의 해결해야 할 문제도 남아있고 그 부역자들에 의해서 새롭게 생산된 명예훼손과 왜곡을 통해 그들이 받은 오해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 아픔은 어떻게 해야 끝이 나는 것일까?


 부역자들 중 한 부류는 자신을 나라를 지킨 보수라 생각하는 퇴역군인 할아버지와 그 세대를 살아온 할머니들이 있다. 그들은 정말 나라를 지켰고 이 나라 대한민국을 지탱해온 뿌리임이 확실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은 존중받고 존경할 만한 어른들이어야 했는데.. 사회는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아니 지켜주지 않았다. 그들을 가난한 노인으로 기초노령연금을 수령하지 못하면 안 되는 노인으로 무료급식소에 아침부터 길게 늘어선 줄을 서지 않으면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할 수 없는 노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존중받아야 하고 존경받아야 할 대상인데 사회는 그들을 뒷방 노인네로 사회가 책임져야 할 짐덩이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부는 더 정확하게는 자유 한국당으로 대변되는 극우세력들은 세금으로 그들을 지탱하고 있는 거대한 주인과 종의 관계로 그들을 장악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들을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지 너희들이 받는 연금도 돈이 모자라서 다 주지 못하는데 쟤들은 국가유공자 대우를 받는데..... 한해에 받는 돈이 이 정도야~~'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마치 내 밥그릇이 빼앗긴 것처럼 그들을 향한 이빨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구조로 만들어 버렸다.


 많은 젊은이들이 노령세대가 떠나고 젊은 유권자들이 많아지면 흔히 말하는 보수파는 힘을 잃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큰 착각일지도 모른다.


 위에서 했던 질문을 다시 한번 던져보자! 어떻게 하면 5. 18의 아픔을 끝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용서'와 '존중'에 그 해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뻔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말이다.

 아직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이들을 어떻게 용서하란 것인가? 이러한 의문이 분명 남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가 유일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용서는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행위이다. 내 마음에 뭔가를 담는 방이 존재한다면 사랑의 방이 가장 클까? 분노의 방이 클까? 나는  두 방의 크기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래도 분노와 증오의 방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생각해도 사랑의 감정은 더디고 느리지만 분노의 감정은 즉각적이고 폭발적이어서 모든 관계를  다 망처 버린다. 모든 것을 잡아먹어버리는 거대한 힘을 가진 게 분노의 방이다. 그런데 마음의 방이 클수록 나의 삶은 그 방에 의해서 조종당하게 된다. 용서는 그 방을 비우고 떠나보내는 행위이다.

 죄를 가리고 처벌을 받는 것은 나의 영역이 아니라 사회의 제도와 법이 처리할 부분이다. 그리고 회개와 사과는 행위의 주체인 그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만약 사과를 받고 응당한 처벌을 받아야 내 모든 삶이 정상화될 수 있는 것이라면 나의 삶을 다른 이들이 결정에 의해서 움직이는 수동적 삶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용서를 통해서 내 마음에 자리를 비움으로 그의 어떠함이 아니라 나의 어떠함으로 삶을 사는 것만이 '용서'가 가지고 있는 힘이다.

 내가 이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요즘의 내 삶에 장례식 같던 5월이 존중과 용서로 '축제'의 5월이 되었다. 이제는 나에게 축제와 존중 그리고 가정의 달이 되었다. 많은 이들이 지금도 5월의 저주 갇혀있는 이들이 장를 경혐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많은 다른 저주에 갇힌 이들도 자유를 경험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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