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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배우 Jun 10. 2019

십자군 전쟁 vs 퀴어 사냥

죄와 죄인에 대한 생각

 얼마 전 'Hood'라는 영화를 봤다. '로빈후드'의 탄생에 관한 영화였다. 십자군 전쟁에 동원된 귀족과 그 사이 종교계와 결탁해 영지와 권력을 빼앗은 정치인, 그리고 황제와 권력대결에서 이기기 위해서 전쟁을 패하게 만드는 추기경, 권력과 암투에 관한 이야기였다. 뭐 영화를 기초로 십자군 전쟁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다만 내가 이해하고 있는 십자군 전쟁의 참담함과 퀴어축제를 향한 일부 기독교계의 반응이 비슷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2001년도에 필리핀으로 단기선교를 갔었다. 한참을 그 나라의 문화와 종교 역사적 배경에 대해 공부하고 현장을 찾았다. 사실 단기선교라고 하기보다는 선교현장 답사가 더 맞는 표현이었을 것 같다. 현지 목회를 응원하고 현장에서 사람들과 교재하고 선물을 주는 형식의 방문이었다. 그때 선교사님의 인도로 '성어거스틴 성당'에 방문했다. 꽤 규모가 있던 성당에는 100여 점의 그림과 동상들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마주한 포교활동을 가장한 전쟁의 참혹함이 내 마음을 눌려왔다.

 '옳은 것', '좋은 것'을 전하는 명목 하에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방식으로 '전쟁', '탄압'을 사용한 결과는 참혹했다. 자랑하듯 걸려있는 그림에 탐욕스러운 표정의 수사가 군인과 악수하고 있고 군인의 발에 원주민이 밟혀있던 그림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그런 결과였을까? 2001년 당시에 필리핀 국민 90%가 가톨릭이지만 태어나 3번 성당을 찾는다는 농담이 있었다. '세례', '결혼', '장례식' 그나마도 1번은 살아서가 아니라 죽어서 가는 것이니 90%라는 수치는 의미 없는 수치였다.




 십자군 전쟁은 'crusade'라고 불렸다. '하나님의 군대', 또는 '성전'으로 번역된다. 성스러운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 맞았을지 모른다. 실제로 이슬람은 기독교의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위협에 대한 전쟁은 당연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역사에서 기억하는 십자군 전쟁은 황제와 교황의 권위 다툼이었거나 정치적으로 약한 기반을 다지기 위한 수단이었던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전쟁으로 내몰린 하나님의 군대의 군인들은 무슨 죄였던 가? 의미 없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 그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우리는 이슬람을 바라보며 수니파 무장단체들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로 아랍을 다녀온 사람들이라면 인권에 대한 자유가 높지는 않아도 모든 사람들이 수니파 무장단체들처럼 자살테러를 일삼고 사람들에게 총질을 해대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두려움이라는 무서운 무기에 잠식당해 진짜로 싸워야 할 대상을 잃어버린 '십자군 전쟁'을 매 순간 치르고 있는지 모른다.




 참고로 난 동성애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입장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죄'다. 성경에서는 그것을 명확히 말하고 있고 나는 성경을 믿는다.

 하지만 일각에서 동성애를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 내는 논리에는 도무지 찬성할 수 없다. 그들이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데이터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윽박지르고 공포감을 조성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싸우게 내모는 그들의 방식은 이미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대상을 잃어버린 '십자군 전쟁'같다.

 동성애 때문에 에이즈가 무분별하게 퍼지고 있다.라고 이야기하며 당신이 낸 건보료, 세금이 그들에게 다 낭비되고 있다. 라던지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목사님들이 더 이상 강단에서 '동성애'가 '죄'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미국의 한 주에서는 동성커플 결혼 주례를 거부했다가 벌금을 맞았다. 우리도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법률 통과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통과되지 않게 해야 한다. 라던지 하는 이야기들은 도무지 받아들이 힘들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초반은 늘 그럴듯하다. 그러나 결국 그것에 대처하는 자세와 태도는 과격하고 비상식으로 몰고 간다. 그럴듯한 이야기와 내가 믿는 진리를 훼손하는 것 같은 사회의 움직임이 나를 옭아매고 더 이상 너는 그렇게 살 수 없어 지금보다 더 힘들 거야 라고 이야기하며 공포를 조장하며 두려움에 소리 지르게 만드는 방식은 도무지 동의가 되지 않는다.


 예전에 코스타 강사님이라던 한 기자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북한은 사마리아고 그 땅은 우리가 예수살렘을 들어가기 위해서 돌아가야 할 땅이 아니라 지나가야 할 땅이다. 예수님도 사마리아를 지나시며 수가성 여인을 만나시지 않았나.  그래서 통일은 되어야 한다.

 그의 생각에 너무 동의가 돼서 어떤 분을 통해서 기자분과 개인적인 만남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어냐 물었더니 대답은 너무 당황스러웠다.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된다.'였다. 퀴어 문제를 다루는 일부 기독교계 반응이 딱 이런 느낌이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들의 친구셨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이런 썩을 매국노야! 당장 부정축재한 돈을 사람들에게 돌려줘라!'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 먹고 마시며 그와 교재 하셨다. 그리고 삭개오는 그 사람에 감격해 스스로 그의 부정 축재한 재산을 사람들에게 나누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중세의 십자군 전쟁처럼 공중 권세 잡은 자와 영적 전쟁을 벌이지 않고 그들의 속임에 넘어가 사단의 짜 놓은 판에서 싸움을 싸우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깨어있음으로 사단과 전쟁하고 하나님께로 흘러나오는 사람의 강물을 약하고 악한 죄에 묶인 그들에게 흘려보내야 할 때가 아닐까?


 '사랑의 매'라고 이야기하며 내가 드는 매는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마구 휘두르는 매는 예수님이 성전을 청소할 때 쓰시던 매듭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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