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와 두려움을 극복하기
연극을 연출할 때의 일이다. 무척 기구한 사연의 여고생 역할을 찾고 있었는데 때마침 오디션을 봤던 친구 중에 비슷한 사연의 아픔을 가지고 있던 친구를 발견했다. 나름 좋은 의도를 가지고 그 친구를 역할에 캐스팅했다. 아픔을 잘 표현해줄 것도 같았고 또 작품 속에서 자신의 아픔도 조금은 치유받길 원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배역에서 아픔은 표현이 힘들어 보였고 자신의 상처에 대한 힐링도 얻지 못하는 듯 보였다. 연습하며 자신의 아픔에 대한 이야기도 실제로 해보고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해 봤지만 뭔가 꽉 막힌 것처럼 뭔가가 터져 나오지 않았다. - 소리는 지르지만 슬픔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답답함 - 사실 이런 경험은 단회적 경험은 아니다. 그 이전에 장애를 가지고 있는 엄마의 아픔을 표현해야 했는데 그때 마침 신체에 장애를 가지고 있는 배우가 지원을 해서 기회가 좋다고 맡겨봤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두 번의 다른 경우를 보며 처음에는 그저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표현이 되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고 그 감정을 정리해서 표현하는데 집중해서 연습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배우의 역량 부족이라 생각해 버릴 수도 있지만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속에 타는 듯한 감정의 에너지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고 그 에너지는 실체처럼 연습 현장에 터져 나오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제되어 연기에 사용되는 것이 잘 되지 않았다.
어쩌면 위의 경우가 기존의 배우들이 느끼는 가장 어려운 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누구나 느끼고 누구나 힘겨워하는 부분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경험은 가지고 있지만 표현은 되지 않는 것. 느꼈던 감정과 정서도 고스란히 남아있고 감정에 대한 에너지도 갈무리되어있는데 실상 표현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된다.
예를 들어서 극장에서 재미있는 영화를 볼 때 장면에 몰입해서 웃거나 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소극장에 100명의 사람이 앉아 있는데 연극을 보고 싶은 생각이 없는 100명이 배우가 뭐하나 쳐다보거나 심드렁하게 앉아있는 곳에서 소리를 내어 웃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이런 건 마치 고3 수학선생님이 집중된 분위기에서 출제빈도가 높은 적분 문제 풀이를 하고 있는데 그 과정이 웃기다고 혼자서 박장대소를 하며 기립박수를 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며 모든 종류의 반응을 하며 살아간다. 웃기면 웃고 슬프면 울기도 하며 눈물이 나는데 이를 꽉 물어 참기도 하고 분노가 일어나면 화를 내기도 하고 이를 악물고 모욕감을 참아내기도 하는 등 복잡 미묘한 감정을 나만의 방식으로 느끼고 반응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왜 무대에 오르거나 혹은 나의 행동에 많은 사람들이 집중할 만한 상황이 되면 반응이 어색해지는 걸까?
나 역시 연출로 연극을 시작했지만 배우를 하며 동일한 어려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고 연출을 하며 배우들에게 이걸 왜 못하냐며 닦달했던 나 자신을 반성하고 사과도 많이 했던 것 같다. 말인즉 나 또한 내 정서와 내면에 갇힌 듯 한 감정의 에너지를 무대에서 꺼내 놓는 것이 너무 어려운 일임을 깨달았고 정말 많은 방식으로 극복해보려 했다. 다음은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찾아낸 내 이야기다.
사실 표현의 어려움에 대한 인식과 원인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에게 있어서 표현을 가로막는 리미트는 수치였다. 나는 사람들에게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시원하게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하고 내려오면 되는데 오히려 잘해야 된다는 압박은 사람들의 시선(혹시 나를 어떻게 판단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대한 두려움이 되어 나를 위축시켰다. 이미 연습하고 만들어 온 것들을 그냥 하면 되는데 자꾸만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다 보니 망설임이 생기고 망설임은 감정선이 끊어지게 하고 결국엔 최악의 연기를 하게 만들었다.
처음 수치를 돌파하기 위한 전략은 오기였다. 뭔가 범접하기 어려운 아우라를 흘리며 공연 1시간 전부터는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연출도 집중을 방해하지 못하게 했다. 마치 세상에 나만 존재한 듯 미친 듯이 인물에만 집중하고 다른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그런 집중으로 수치를 돌파하려 했다. 결과는 절반의 성공이 있었다. 처음으로 무대 위에서 칭찬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튀거나 돋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의 일관된 인물로 끊어지지 않는 감정선을 갖게 됐다는 칭찬을 들었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않아도 나 스스로 집중을 흩어버리면 예전과 똑같은 증상이 나타났고 청중에 대한 두려움은 눈덩이가 굴러가듯 더 커져 불안함에 공연을 망치기 일쑤였다. 그리고 강제적 집중은 인물의 다양한 감정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기보다 배우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 에너지의 크기로만 인물을 표현하다 보니 연기의 한계(표현의 획일화)가 금방 찾아왔다.
그래서 선택한 두 번째는 무대에서 힘을 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생각 속에서는 잘 작동했지만 실제적으로 무대에서 힘을 뺀다는 상상 속의 이미지와 현실에서 실제로 힘을 빼는 간극을 메우지 못했다. 어떤 날은 산 낙지처럼 가벼워 보이거나 힘을 빼는데 너무 많은 힘을 주다 보니 감정도 어그러지고 집중도 날아가 버렸다. 역시 또 한 번의 무대를 망쳤다.
내가 찾았던 마지막 방법은 근원적인 두려움과 화해하는 것이었다. 수치를 없애보려 여러 가지로 고민하며 나는 언제부터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했을까?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왜 두려운가? 원래부터 사람들을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두려운가? 여러 가지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을 나에게 던지고 답을 찾아가던 중 나 자신의 행동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나의 모습이 보이면 감추거나 좋아할 만한 모습으로 나를 바꾸려 노력하며 살았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이런 모습 저럴 때는 이런 모습으로 사람들이 좋아할 모습으로 나를 바꾸며 살아왔었던 것이 보였다. 그런데 무대는 온전히 감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를 열어 보여주다 보니 상황과 사람에 맞춰서 나를 보여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내 행동 패턴을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을지 또 고민하며 나를 바꾸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내가 나를 미워하고 있구나 내가 나를 싫어하고 있구나 한 번도 나는 나를 소중하게 대해주고 있지 않았구나.
어두운 무대에 앉아서 어린 시절 나를 보며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대기실로 들어와 거울을 보고 이야기했다. '미안해' 그것을 시작으로 나는 나 자신과 화해를 해 나가고 있다. 남들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에 좀 더 집중하고 있다. 뭔가 일이 생기면 나의 반응과 감정의 흐름을 복기해보며 그 흐름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렇다고 미친놈처럼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른다거나 슬프면 대성통곡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배우가 대본 분석을 하듯이 내가 왜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 억눌러온 감정과 맞추려 했던 나의 패턴 때문에 나왔던 행동이 있었는지 살펴보고 건강한 반응은 어떤 것이 었을까? 생각해보는 훈련이다. 이 과정에서 내가 나에게 잘 못한 것은 스스로에게 사과하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다면 그 사람에게 사과하고 용서한다.
나는 어떻게 하면 표현을 잘할 수 있을까? 하고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나를 살린 것은 무엇을 더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 꼬여있는 감정선을 하나하나 푸는 것에 있었다. 자장 되어있는 에너지가 나올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것에 정답이 있었다. 지금은 더 풍성한 감정으로 연기할 수 있다. 집중하려 노력하지만 첫 번째 방법처럼 아무도 없는 것처럼 아집과 고집에 가득 차서 오기로 집중하지 않아도 훨씬 풍부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배우가 되었다.
어쩌면 많은 배우들이 아니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의 화해가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