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전편 - 감정의 동의

캐릭터와 공감을 넘어 감정 동의하기

by 김배우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 봄이었다. 당시 하고 있던 뮤지컬은 1년 넘게 해오던 작품이었다. 그러나 축제 출품으로 인해 4인의 출연분을 3인으로 조정해야 했다. 인물의 구성이나 관계도가 좀 틀어졌었다. 그래도 내가 하던 다훈이란 인물은 설정은 같았다. 다만 부딪히는 사람이 달라져서 그렇지 대사나 갈등 발생원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너무나 쉽게 작품을 대했고 준비도 많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날의 사건은 20대 톱스타 설정 남성과 여고생의 캐릭터를 1명으로 줄어들면서 역할이 크게 달라진 여배우로부터 시작됐다. 이미 만들어진 인물에서 다른 인물이 되는 것도 어려운 작업인데 두 가지 캐릭터가 섞이다 보니 당연히 혼란스러웠고 쉽게 집중하지 못했다.

진짜 문제는 그 바뀐 인물과 부딪혀야 하는 나였다(쉽게 생각했는데 말이다). 몇 번의 신 연습이 지나가고 비슷한 부분에서 내가 대사를 또 틀리자 평소 그렇지 않았던 배우가 분에 이기지 못하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때 오고 갔던 말이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내게 꽤 큰 자극이 됐던 모양이다. 원래 지나친 몰입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날은 필요 이상의 몰입을 했던 것 같다. 머릿속에서 혼자서 공연을 5번 정도 처음부터 끝까지 혼신을 다해 복기했던 것 같다. 실제 공연이 시작할 때 마치 공연이 끝난 것처럼 기진맥진했으니 지칠 정도로 과한 몰입 상태가 됐던 것 같다.

실제로 공연이 시작되고 이상하리 만치 머릿속에 이것저것 생각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느꼈다. 아니 좀 더 명확히 하며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 같다(이 생각 역시 당시 들었던 생각이 아니라 공연이 끝나고 난 후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였다)

모든 공연이 마쳐진 후에 대표님으로부터

‘오늘의 공연은 다훈이가 끌어가더라 수고했다.’

라는 피드백을 들을 수 있었다. 의외의 결과였다. 머릿속은 텅 빈 것 같았고 나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그러나 실제 피드백은 나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사실 나는 집중이 좋은 연기로 이어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음의 사례를 하나 더 살펴봤으면 한다.

위의 뮤지컬을 했던 초창기의 일이다. 인물의 에너지도 높고 해야 하는 것도 많았기에 준비과정이 힘들었다. 또 그만큼 연출의 요구조건도 많았다. 공연 시작한 지 한 달쯤 지났던 어느 날 관객도 좀 있었고 내 에너지도 충만하던 날이었다 내 연기에 빵빵 터지는 관객을 보며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심지어 연출자가 줬던 코멘트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완벽하게 해냈다. 관객 반응도 좋았다.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다훈이는 오늘 날라다니다(좋은의미가 아니었다)가 마지막엔 정신을 놓던데’

라는 피드백을 들었다. 나는 분명히 칭찬을 기대했는데 내게 돌아온 피드백은 정서를 놓치고 그냥 극이 흘러가게 기다린 꼴이 됐다는 것이다.

위 두 과정을 살펴보면 단순히 내가 기분이 좋고 에너지가 좋은 것으로는 좋은 연기를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하지만 그 해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경우(내 감정과 정신상태를 되짚어 본 결과)

첫 상태는 내가 연기를 하며 머릿속에 생각이라는 것을 거의 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고

두 번째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관객은 어떻게 보고 있지 등등 여러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배우에게 집중은 필요한 요소가 아니라 필수요소다. 그러나 집중력만 가지고 연기를 할 수는 없다. 다양한 생각의 확장과 발산을 가지고 인물에 한걸음 더 다가서고 내 마음의 동의 과정을 수없이 겪어 나가고 두루뭉술하게 이해했어 라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명확히 동의가 되고 감정이라는 에너지가 내 가슴을 두드릴 때까지 그 감정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배우가 나아가야 할 점이다.

감정적 동의, 첫 사례에서는 집중된 5번의 복기가 감정의 동의(끊어지지 않는 감정의 흐름)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의 연결된 감정선을 잠재의식 속에 만들어 준 것이다. 그래서 무대 위에 올라가서 다음 대사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아도 눈앞에 있는 사건에서 극 중 인물로 반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본 분석은 연기를 늘려 주는 것이 아니다. 대본을 분석하는 과정이 배우가 인물의 감정에너지에 동의를 하며 동화되는 과정을 위해 필요한 요소인 것이다. 때문에 좋은 연기를 위해서는 대본 분석이 필요충분조건이다. 그러나 대본 분석을 한다고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기본중의 기본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인물을 내적 에너지를 얼마나 구체화하고 그 에너지를 내가 납득하고 심지어 내가 그에게 앞서 화내고 싸워주고 웃을 수 있는 지의 싸움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 사람들은 처음의 과정을 생략해 버리기 일쑤다. 대본 분석의 과정을 스킵한 채로 연결된 감정선을 담으려 한다. 그것은 마치 아침산책에서 지나가다 잠깐 본 자전거를 기억해 문제를 발견하고 그 문제를 해결해 다시 상품으로 출시하는 것 같은 경솔함이다. 자전거를 리뉴얼하기 위해서는 제작하기 위한 도면도 필요하고 실제로 그것을 움직여본 경험도 필요하다. 사용자들을 테스트를 거처 불편사항을 적용하려면 처음 설계 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전반적 이해가 필요하다. 대본 분석의 과정은 연출가가 중간에 던 저주는 문제를 인식하고 수정해 나가기 위한 다면적 인물분석 단계이다.

실제로 무대에 서본 사람들이라면 더 쉽게 이해할 테지만 무대 연습 과정에서 연출가의 질문이 시작되고 요구가 시작되면 인물에 대한 다면적 분석이 없다면 흐름에 맞춰 인물을 수정하기도 캐릭터를 수정하는 것도 힘이 든다. 그러나 인물 분석의 다면적 분석이 된다면 유연한 사고와 수정이 일정 부분 가능해진다. 마치 연극이 아닌 다른 일을 할 때도 정해진 루틴과 프로세스가 바뀌면 사람들은 그것이 효율적이고 쉬워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거부감이 드는 것처럼 연기도 스스로 짜 놓은 플로우가 굳어져 버리면 새로운 행동과 인물을 만드는 것을 극도로 힘들어한다. 차라리 힘들어하는 수준이라면 그는 어느 정도 연기의 관록이 있는 사람이지만 앞선 과정을 모두 생략해버리는 사람이라면 아예 무대 위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태를 직면할 수밖에 없다.




배우는 공감의 스페이셜리스트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공감(이해)에서 그치는게 아니라 감정의 동의(그의 감정을 나도 동일하게 느끼는 것)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감정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로서 외부의 자극에 반응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