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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배우 Aug 30. 2022

용서 vs 사과

용서는 사과 다음에 오는 보상물일까?

아직도 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시리다. 

오늘 8월 29일 경술국치일을 맞으니 더 안타깝고 마음이 시리다. 


힘 있는 자리에 앉아 국민을 대신한 어떤 이들의 개인적 결정이 힘없는 약자들에게 고스란히 무거움으로 남겨져 돌아왔으니 너무나 분통하고 억울하다. 


그래 나는 늘 억울했다. 

평생 광주에서 나고 30살까지 광주에서 살며 

'전두환'의 만행에 대해 분노했고 우리 이웃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이나 삼촌으로 불렀을 법한 사람들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나는 너무나 억울했다. 


그리고 그 억울함이 어쩌면 지금까지도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동질감으로 작용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근원적 질문이 하나 생겼다. 

나의 울분은 그 억울함은 나를 그리고 그 억울함의 당사자들을 앞을 향해 나아가게 만들었는가?


사실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해석에 따라 어떤 부분은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고 어떤 부분은 정체되어 있을 것이니 말이다. 


나는 좀 더 정체되어 있는 부분에 맞춰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내가 이 질문에 주목했던 부분은 바로 '전두환'의 뻔뻔함에서 시작했다. 

자신의 집무실에서 대량학살의 명령을 내렸지만 지금까지도 인정하지 않는 그 뻔뻔함에 3일 밤을 설치고 나서 지금 뭔가 잘 못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옛말에 때린 놈은 편하게 못 자도 맞은 놈은 발 뻗고 잔다고 했는데 

지금이건 정말 반대된 상황이 아닌가? 나는 왜?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저렇게 뻔뻔스럽게 웃으며 발 뻗고 잠을 청하는 이의 사과와 잘못을 인정하는 것에 나의 기분이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인생을 올려놓고 있는가? 


악에 맞서 싸우는 주체적인 시민인 것처럼 의식 있는 대학생으로 연극인으로 살아왔다 자부했는데.. 

그런 것 치고는 나의 모든 결정이 나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결정과 의사에 내 모든 것을 올려놓고 살아온 것이 눈에 보였다. 


물론 안하무인의 태도에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행동이 나의 반응의 전반적인 모든 감정을 지배하고 있다니 내가 

외부 자극으로부터 반응하는 모든 리엑션이 그의 결정에 달려있다니 


이전보다 더 큰 모욕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몰려들었다. 

무엇부터 잘못되었나..




연기를 하다 보면 결국 배우는 무대와 카메라 앞에서 등장인물로 서서 주어진 상황에 그 사람으로 반응하는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인물을 창조하고 연기하는 연기의 9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그 9할이 

인간 '김반장'이 아니라 '전두환'이라는 직접 대면해보지도 못한 사람의 의지에 담겨있다는 사실이 너무 수치스러운 밤이었다. 


'정의'라는 말에 동의하고 지난 지역기반에서 학습된 '피해자'라는 생각이 나를 그곳으로 몰아갔다. 

마치 다져도 한일전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던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의 인터뷰가 지금의 내 상황과 다르지 않았다. 


직접적 연관 자라고 하지만 너무 지차 친 감정이입은 결국 상황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할 이성을 놓게 만들었다. 




모든 면에서 다 틀렸다는 것이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 객관적으로 보고 있지만 당연해야 할 가해자의 태도가 내 내면의 깊은 피해의식을 건드리는 순간 하는 판단은 내가 하고 싶은 모양대로 판단하게 만들었다. 

바로 그 순간의 결정이 생각보다 중요한 순간의 판단이라는 것이 늘 문제였다. 


그렇다면 나는 그다음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하기로 했나?


'용서'하기로 했다. 

무슨 황당한 말인가 하겠지만..


머리를 차갑게 식히고 나니 

용서라는 의미가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예전에는 내가 용서해 버리면 그는 단죄를 받지 않고 풀려나 버릴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저 지금과 똑같은 모습으로 슬슬 웃으며 자신에게 싫은 질문을 하는 기자에게 '나한테 안 당해 봐서 그런가 봐' 같은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던지며 평안히 살아가게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용서는 조금 달랐다. 

용서라는 행위는 상대방의 합당한 태도에 주는 give & take의 교환 물이 아니다 

용서는 그저 내 안에 가득한 용서하지 못한 나의 마음의 큰 방을 비우는 행위다 


그의 죄는 사회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되지 않는다면 

내가 믿는 신의 공의로움이 

아니면 그 '전두환'씨가 어려울 때마다 달려가던 백담사의 석가모니가 우주의 질서대로 그의 위에 놓인 짐을 해결하지 않겠는가?


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그가 진짜 불교에 귀의했다면 회개가 없는 삶을 살지 않았을 텐데.. 그는 진정 불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인정하기 싫어도 

사랑하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크게 미워하는 마음과 나에게 피해를 준 가해자를 향한 마음은 우리 속에 커다란 방을 만든다. 그리고 언제든 중요한 순간에 그 방은 문을 열고 우리에게 기분에 의한 의사결정을 종용한다. 


용서가 중요한 이유는 상대방에게 주는 면죄부가 아니라 나를 그 감옥에서 나 스스로 풀어주는 행위다. 


그렇게 풀고 나서야 중요한 순가 그가 진짜 자신이 저지른 잘못 앞에 설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사실과 사람과 대면하더라도 내가 흔들리지 않을 이유가 된다. 


몇 년 전 개봉했던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이런 용서의 가치를 폄하하고 말았다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그가 지적한 용서의 정신승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맞다 알고 있다. 

하지만 진짜 그 가치를 향해 달려가고 그 마음과 맞닿아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용서의 길을 사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피해자'를 향한 사죄를 지나 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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