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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얘긴 안 해줬으면 좋겠어

by 이요브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손톱이 자란다.


자라난 손톱을 깎는다.

내 손가락의 머리가 잘린다.







바깥세상보다 집을 좋아했던 나는 종종 콘크리트 바닥 틈 사이를 비집고 자리잡은 잡초나 민들레를 찾아다니듯 집안을 탐색했다. 주로 새로운 물건에 쓰인 글이나 낯선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는데 종류를 구별하지 않았다. 수녀님의 자기애가 지루했던 회고록, 파란 안개가 낀 바다 사진을 배경으로 혼란하고 자조적인 가사가 가득했던 가수의 음반 테이프, 당파가 뭐라는건지 어려운 말의 무협지, 여자의 작은 가슴이 야릇했던 침대 밑 만화책.


음침한 어린이를 위해서였는지 언제부턴가 어머니는 새 책을 사다 주셨다. 확실하지 않지만 신문 문화면에 실린 이달의 책이거나 EBS 추천 도서였을 게 분명했다. 대부분 이해하기 어렵거나 너무 교훈적이어서 재미없었다. 이 까다롭고 건방진 꼬맹이에게 강렬한 기억을 남긴 책이 있었는데, 톨스토이의 단편을 묶은 『사람이란 무엇으로 사는가』였다. 단편집은 처음이라 책 제목과의 이야기의 연결점을 파악하지 못해 꽤 오래 찝찝해했다. 짧은 이해력과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안고 고민하기를 며칠, 어느 날 책 제목만 또렷하게 보였다.


그러게, 사람은 왜 사는 걸까? 부자가 되기 위해? 부자는 부잔데 왜 더 많은 돈을 가지려고 하는 걸까? 나는 무엇으로 사는 걸까? 나? 글쎄? 그냥 이러다 죽는 건가? 죽음이라는 것은 무엇 일까? 어떤 느낌일까? 몸은 사라지고 정신만 남아 떠다니게 되는 것일까? 나는 그냥 공기 중에 홀로 존재하게 되는 것일까? 존재하는 것조차 존재하지 않음으로 전기가 꺼진 냉장고 같은 걸까? 이 생각을 하는 것조차 없는 건가? 늦은 밤 처음으로 '죽음'이라 는 단어를 마주한 작은 나는 무엇을 고민했었는지도 잊고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잠이 들기 어려웠다. 그것은 9살짜리가 감당하기 엔 너무나도 큰 질문이었다.


한동안 눈을 감으면 내가 죽고 생각만 남은 것 같아 눈을 부릅뜨고 천장을 바라봤는데, 모두가 잠든 지하방은 달이 없는 밤처럼 무한한 우주로 변했다. 무게감이 없는 얇은 이불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나를 띄웠다. 지금 내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 걸까. 생각은 팽창하는 우주처럼 뻗어나갔다. 책내용도 이해하지 못했던 꼬맹이가 답을 찾을 수 있을 리가. 매일 밤 겁에 질려 눈물을 흘렸다.


혼자 소화할 수 없는 무게를 나누고자 늦은 점심을 먹고 난 오후,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부자는 이미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버는건가요? 어차피 부자들에게도 붕어빵 한 봉지는 천 원이고 밥은 하루 세 끼인데. 빨래를 개고 있던 손이 잠깐 멈췄다. 입술을 가볍게 다물며 음... 그리고 어떤 말씀을 하셨는데 답은 잘 기억나질 않고, 그 질문이 끝날 때까지 고개를 숙여 빨래를 개던 어머니의 옆모습만 분명하게 남았다.


여전히 의문은 풀리지 않았지만 어머니에게 더는 물어볼 수 없었다. 그래선 안될 것 같은 감각이 울렸다. 해소되지 못한 질문은 나의 존재와 삶을 불안하게 했다. 이대로 사라지는 거라면 나는 무엇일까? 나는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걸까? 왜 사는걸까? 어머니는 왜 나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을까.


같은 반 짝꿍을 떠올렸다. 붉은 갈색 머리가 동글동글 말려있고, 말린 머리의 원보다 눈이 큰 친구였는데 가끔 거짓말을 해서 당황스럽게 하는 점을 빼면 제법 상냥하고 활기찬 아이였다. 그날도 풍성한 곱슬 머리를 양갈래로 높게 묶고 흰색 레이스 셔츠에 빨간 모직 원피스를 입고 팔랑거렸다. 언제나와 같은 짝꿍의 얼굴에 반가움과 흰색 레이스 셔츠에 대한 약간의 부러움이 스쳤다. 잠깐의 부러움 때문에 중요한 질문을 잊어선 안됐다. 나는 가방을 책상걸이에 걸어두고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 바로 고민을 털어놓았다.


"있잖아, 죽음이란 뭘까?"

“죽음?”


짝꿍은 약간 벙-찐 얼굴을 하고 되물었다.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나는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 아니, 죽으면 말야. 우린 우주로 가게 되는 걸까? 우주는 아무것도 안 들린데, 생각한다는 건 어떻게 알까? 근데 왜 열심히 사는 걸까? 어차피 죽는데. 그리고, …. 질문이 맥락없이 던져지다 막혔다. 그리고 내가 궁금했던 것들을 다 내뱉기도 전에 짝꿍의 눈물이 먼저 쏟아졌다. 두려움에 찬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 하지 마, 너무 무서워”


이번엔 내가 느닷없이 누군가에게 맞은 얼굴이 됐다. 잠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큰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과 까만 눈동자만 보았다. 나는 내 생각만으로 친구를 울렸다.


친구는 나를 낯설고 두렵게 바라보았다. 그것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닌 ‘죽음’에 대한 공포일 수도 있었으나 이해하지 못했다. 그 순간 나는 세상에서 제일 흉폭한 괴물이 된 것 같았다. 나는 분명히, 누군가를 울릴 정도로 찔렀다. 내 존재가 위협이자 무자비한 폭력이 된 것 같아서, 너무 놀라서 사과의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날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모두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 같았다. 나의 어떤 생각이 잘못된 것인지 알 수 가 없어서, 그냥 하루종일 ‘응’이라고만 답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기억나질 않는다. 아니, 나는 늘 혼자 횡단보도를 건넜다.


나는 자주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의심은 확신으로 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악독한 나의 괴물이 언제 입 밖으로 나올지 알 수 없어서, 나는 나와 가까이에 있는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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