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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선 Sep 20. 2019

신중히 앞뒤로 생각하고 행동하자

주역 산풍고

2019년 9월. 요즘 『주역』을 읽고 있다. 주역은 간단히 말하면,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고전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맹자도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계속 변화하는 상황에서 한 가지 방식만을 고집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배달일을 하는 것도 이와 같다. 콜을 잡고, 또 잡을 때마다 동선은 수시로 변한다. 어떤 순서대로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새로운 콜이 추가되면 업소 위치, 배달지 위치, 음식 조리시간 등이 다시 끼어들기 때문에 짜인 동선을 재구성해야 한다. 또 그렇게 동선을 짰더라도 눈앞에 걸린 신호등 불빛에 맞춰, 동선을 다시 바꾸기도 한다. 그야말로 수시로 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콜을 5개 이상 들고 있으면, 머리를 굴리느라 뇌수가 말라 가는 느낌이 든다.      


어느 날, 생각 없이 막 누르다가 동선이 동서남북으로 꼬인 적이 있었다. 원래 콜을 잡을 때는 동선을 가급적 한두 방향으로 가지런하게 잡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 결국 문제가 생겼다. 콜을 추가로 잡을 때마다 어느 한 가게 주문을 자꾸 뒤로 미룬 것이다. 그래도 일단 그 가게 주문의 배달지가 바로 앞 2분 거리였기 때문에, 픽업을 늦게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픽업이 너무 늦어, 업소 주인의 컴플레인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먼저 픽업할까 했지만, 주문 한 개 때문에 번잡하고 어지럽게 돌아다니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그렇게 콜을 처리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중에 고객센터에서 톡이 왔다.           


“업소에서 늦은 픽업으로 화가 나셨는데, 초강성이십니다. 우선 처리 부탁드립니다. ㅠ”          


드디어 주역의 산풍 고(山風 蠱) 괘를 만난 것이다. 이 산풍 고 괘는 ‘산 아래에 바람이 불어 상황이 뒤얽혀버렸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상황을 만날 때마다 1차원적으로 즉각 반응하기를 즐기던 나이기 때문에, 난 바로 심기가 불편해졌다.     


‘아니 이 음식 하나 따위 가지고 감히 나에게 화를 내는 거야? 다 사정이 있으니까 늦게 가는 거지. 그걸 이해 못하고...’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를 생각했다. 그 가게 주인이 나한테 직접 불만을 표하면, 그냥 배달을 가지 말까? 아예 왕창 늦게 갖다 줘 버릴까? 하며 최대한 골탕 먹일 거리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엘리베이터 안 특유한 그 고요함은 곧 이런 상황이 오게 된 원인을 내 머릿속에 떠올리게 했다.     


그 고요함 덕택에 산풍 고 괘의 ‘선갑삼일 후갑삼일(先甲三日 後甲三日)’에 접어든 것이다. 이 말은 상황이 헝클어진 흐름을 따져보고,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가정해 본 후에 그로 인해 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를 다시 시뮬레이션해보라는 뜻이다.          


그 고요함 안에서 나는 내 동선 편하게 하자고 이 주문을 자꾸 뒤로 미루었던 내 이기적인 행동이 떠올랐다. 역시 아까 먼저 처리했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어느 정도 예상이 되는 불길함을 계속 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뭔가 좀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어찌 됐든 픽업하러 가서 죄송하다는 말을 해야지 싶었다. 

또, 차후에는 일찍 일찍 픽업하러 와서 이 사건으로 잃은 내 신뢰를 회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차후에 혹시나 또 우연히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죄송하다는 말로 그냥 좋게 넘어갈 수 있는 원만한 관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산풍 고 괘의 어지러운 상황을 만났을 때는 낮추면서 더는 나아가지 말고 신중히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러면 어지러운 상황을 만났다 하더라도 크게 형통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당장 눈앞에 닥친 상황을 모면해보려는 생각에 연연해서, 앞을 돌이켜보고 뒤를 시뮬레이션 해보지 못하는 ‘멍청함’을 범하면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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