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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선 Aug 23. 2019

자연을 잃어버린 신체

캘리번과 마녀

어릴 적부터 새벽 1~2시까지 일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다 보니, 밤늦게까지 일한다는 데에 별다른 의심을 해보지 않았다. 집 근처 피자집에서 오전 11시부터 밤 11시까지 12시간 동안 풀타임으로 일하는 데 있어서도, 별달리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일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고, 마치 당연한 것처럼 인식하며 살아온 것이다. 근 20년 동안.      


지금 일하고 있는 배달의 민족에서도 자정까지 일하기를 즐겨 했다. 하지만 책 속에 그 구절을 읽고 나니, 이제는 정말 즐겨 한 건지조차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캘리번과 마녀』라는 책은 자본주의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그 충격의 정도를 가늠할 수가 없다. 그만큼 이 세상은 잔인함 그 자체였다.     


그중에 한 구절이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게 했다.          


자본주의는 모든 자연스러운 삶의 즐거움을 우리에게서 박탈하고자 한다. 또한 자본주의는 자연(=본성)이라는 장벽을 깨뜨림으로써, 또한 전 산업사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노동일을 태양, 계절적 순환, 신체 그 자체의 한계 이상으로 연장함으로써 ‘자연 상태’를 극복하고자 한다.

- 『캘리번과 마녀』(갈무리), 197쪽.      


소유라는 개념이 없이 다 같이 동네 땅을 일구며 살던 머나먼 시대를 지나, 노동시간을 팔아야 하는 현시대에 우리는 태어났다. 하필 태어나보니, 내 땅은 없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던 생활에서, 해가 져도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해가 긴 여름과 해가 짧은 겨울을 기계적인 시간 단위로만 보여주는 핸드폰 시간을 보며, 해가 길건 짧건 밤낮을 구분하지 않고 같은 노동시간을 일하며 우리는 참 열심히 살아간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수렴하는 음의 기운이 가득한 밤에 거꾸로 발산하는 양의 기운인 육체노동을 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해와 달을 넘어서서, 자연을 이겨보려고 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최근에 같이 일하시던 동료분이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분은 센터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기로 유명하신 분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열심히 생계를 꾸리다가 안타까운 운명을 맞이하셨구나’라며 ‘아 훌륭한 가장이셨다’라고 치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자본주의의 구조를 낱낱이 파헤치는 책을 읽고 있는 지금은, 그 죽음이 다르게 느껴진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자연을 거스르며 자연을 넘어서려다 그렇게 가신 게 아닌가 싶다. 이 산업사회는 우리에게 밤에도 일할 수 있는 생활 체계를 선물했다. 달이 떠 있는 밤에도 마치 환한 대낮처럼 일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마치 밤에 환한 형광등을 보고, 낮이라고 착각하고 사는 양계장의 닭들처럼.     


밤에는 특별히 손에 돈을 조금 더 쥐여주고서, 더 일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코인을 투입한다. 그러면 나는 자연을 거스르며 스스로 생명력을 깎아 먹고 있으면서도, 지금껏 조금 더 주는 그 코인에 오히려 고마워했다. 자본주의의 지배계급층들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던 것이다.         


가끔 나보다 더 심각한 노동환경에서 새벽 내내 일하시는 환경미화원 아저씨들을 지나칠 때마다, 뭔가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이제는 명확히 알 것 같다. 나는 그래도 밤늦게까지 일하는 정도지만, 저분들은 자연을 이미 초월하신 것처럼 밤부터 새벽 내내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밤낮을 구분할 수 없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구분할 수 없고, 내 체력의 한계를 이미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지금의 내 몸 상태를 보노라면, 정말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기계적인 신체가 됐다는 걸 실감한다. 해가 지면 일하기 힘들다는 몸의 신호를 무시하며 살아온 지가 너무 오래된 것 같다. 밤에 몸이 피곤하면 커피로 몸을 마비시키면서까지 우리는 참 열심히 살아간다.     


그렇게 누군가의 생명력에 의해 만들어졌을 상품을, 다시 우리가 구매하고, 또다시 그런 상품을 만드는 일에 생명력을 바치는 삶인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여전히 지배계급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자를 격려하기를 즐겨 하지만, 나눠 갖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습성은 여전하다. 향후 몇백 년이 지나더라도, 그러고 있겠지.     


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 계층의 불만이 한계치에 이를 때쯤이면 기본소득이라는 제도가 급격히 논의될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계급구조를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미국의 부유세도 이런 맥락에서 논의가 시작됐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에 왠지 믿음이 간다.     


그럼 우리는 이 자본주의 구조하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각자 알아서 판단하며 필요에 맞춰 살아갈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에 노동해야 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나도 돈이 필요하면 밤에 일할 수도 있다.     


어쨌든, 실비아 페데리치의 말마따나 자연을 거슬러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어, 오후 7시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 그렇게 밤 9시 반이 넘어가니, 내 몸이 자고 싶다는 신호를 보내옴이 느껴졌다. 마비되었던 신경이 돌아오는 걸까.     


일몰 후 노동을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지금부터는 부득이 알바 스케줄에 변동이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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