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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균 Oct 12. 2024

<흑백 요리사>와 <비극의 탄생> (1)

아폴론적 예술과 디오니소스적 예술

ⓒNetflix


마나님과 엉덩이 붙이고 앉아 휴일 아침 10시부터 저녁 8시까지 <흑백 요리사>를 정주행 했다.


함께 컨텐츠를 보며 노닥거리는 걸 무척 좋아하는 우리지만, 한 컨텐츠를, 그만 보고 싶음을 꾹 눌러 참으며, 10시간을 넘게 정주행 한 것은 처음이다. SNS던 뉴스던 뭔가를 누르면 무조건 우승자 관련 스포일러가 보여서 어쩔 수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SNS를 할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숙제를 해치웠다고도 볼 수 있다.


평소 파인 다이닝을 즐기는 취미가 있는가? 그렇다면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가? 맛있는 것을 찾아다니며 먹는 행위는 경연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혹은 미술, 음악, 문학처럼 요리는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요리가 예술이라면 다른 예술들과 구분되는 점은 어떠한 것이 있을까?


이 글을 읽고 나면 이러한 질문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예술이라는 담론의 직선 위에서 어디쯤 요리가 예술로 존재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타임라인에 쏟아지는 <흑백 요리사> 관련 담론들 위에, 나도 이렇게 쓸데없는 말 몇 마디를 보탤까 한다. 거창하게 시작하는 것 같지만 실은 <비극의 탄생>으로 <흑백 요리사>를 설명하는 글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1844~1900)


니체는 예술을 아폴론적 예술과 디오니소스적 예술로 구분한다.


아폴론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해와 낮을 관장하는 신이다. 해가 떠오르면 자연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던 물체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산이 보이고, 나무가 보이고, 돌과 새와 다람쥐가 모습을 드러낸다. 해가 머리 위에 오르면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는데, 그 순간 모든 물체들은 개별로서 존재하게 된다. 누군가의 그림자 안에 숨거나, 누군가와 그림자를 겹칠 수 없기 때문이다. 아폴론은 그래서 개별성과 질서를 상징하는 신이기도 하다.


디오니소스와 아폴론. 디오니소스는 술과 도취의 신이기도 하다. ⓒThe College of Phychic Studies, UK


디오니소스는 반대다.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는 한번 찢겨 죽었다가, 다시 합쳐진다. 디오니소스는 어둠을 상징한다. 해가 지면 개별은 사라진다. 달도 뜨지 않는 어두운 밤에 우리는 산과 나무와 돌과 새와 다람쥐를 구별할 수 없게 된다. 모든 것은 하나로 합쳐져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 형태와 경계가 사라진 곳에는 전체성과 혼돈이 남는다.


니체는 대표적인 아폴론적 예술로 회화, 판화, 조각과 같은 조형예술을 꼽는다. 이러한 예술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하다. 그 형상과 형태를 잘 관찰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형상과 형태에는 아름다움의 질서가 있다. 황금비는 1:1.618이다. 사람의 인체 비율은 머리와 몸의 길이가 1:8일 때 가장 아름답다. 원근법이 흐트러지지 않은 그림이 아름답고, 난색과 한색이 어우러진 그림이 아름답다. 다비드상은 미켈란젤로 시대의 사람들이 보아도, 현대의 우리가 보아도 너무나 아름답다. 아폴론적 예술은 그 예술이 왜 아름다운지 설명하는 것이 비교적 쉽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위키피디아 제공


아폴론적 예술의 반대편에서,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예술의 대표로 음악을 꼽는다. 음악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음악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눈을 감는 것이 좋다. 음악을 감상하기 위해 그 음악의 형상과 형태를 관찰하지 않아도 좋다.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5번을 듣는다고 할 때, 피아노나 개별 바이올린들을 관찰한다고 그 아름다움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피아노의 음 하나, 첼로의 떨림 하나를 분석한다고 음악을 더 잘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음악은 개별로 분절하지 않고 전체를 느껴야 더욱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형태와 경계가 사라진 상태여야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그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요리는 예술인가? 이 질문에 정답은 없다. 나는 "과학은 그 시대 과학자들의 신념 체계에 불과하다"는 콰인의 말을 참 좋아하는데, 나는 어떠한 절대적인 지식을 전제하는 태도를 지지하지 않는다. 다만 나머지 맥락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일단 요리가 예술이라는 전제로 글을 쓰도록 하겠다. 요리가 예술의 대상이라면 파인 다이닝을 즐기는 것은 물론이고, 맛있는 것을 찾아가고, 음식을 즐기는 것은 또한 당연히 예술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나는 '음식을 먹으며 그 음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으면' 그것을 미식(美食)이라고 생각한다.


자, 미식을 예술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미식은 아폴론적일까, 디오니소스적일까?


파인 다이닝의 핵심 요소 중 하나는 플레이팅이고, 어느 레스토랑이나 손님에게 나가기 직전 마지막 플레이팅은 반드시 셰프의 손을 거친다. 시각적 아름다움도 당연히 미식의 요소 중 하나다. <흑백 요리사>에서 수많은 밈을 만들어 낸 장면,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백종원이 음식을 먹는 장면을 보면, 평가자가 요리를 시각적으로 감상할 수 없음을 알고도 셰프들은 모두 플레이팅에 공을 들인다.


몇 주 동안 수많은 밈을 생산해 낸 그 장면 ⓒNetflix


하지만 <흑백 요리사>의 모든 경연에서 요리의 시각적 완성도는 평가의 요소가 아니다. (심사위원의 마음속에서 가산점으로 작용했을 수는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우선 <흑백 요리사>는 요리를 아폴론적 예술에서는 먼 것으로 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평가의 요소는 어떠한가? 백종원은 <흑백 요리사>의 시작 부분에서 오로지 맛으로만 평가하겠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맛'은 단지 미각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코를 막고 양파를 먹으면 사과와 구분할 수 없게 된다는 걸 아는가? 맛은 단지 미각이 아니라, 냄새로 구분하는 후각. 이빨과 혀에 닿는 느낌과, 입술과 입천정에 닿는 차갑고 따뜻함을 구분하는 느낌과, 무르고 단단함을 구분하는 촉각. 바삭, 와삭, 으적, 우두둑거리는 청각까지. 인간이 가진 모든 감각이 총동원된, 즉 정말 많은 것들이 종합된 어떤 느낌이다. '맛'은 실은 굉장히 복잡한 경험인 것이다.


이것 하나하나를 구분해 내는 것이 의미가 있겠는가? 혹은 가능은 할까? 칼국수를 넘길 때 목구멍에 가득 뜨거운 것이 들어찬 그 느낌을 칼국수에서 분리해 낼 수 있을까? 침에 용해되어 혀로 전달되는 알사탕의 달콤함을 침에서 분리해 낼 수 있을까? 따뜻한 수프를 마시고 몸 전체가 따뜻해지는 느낌에서 따뜻해짐 만을 분리해 낼 수 있을까?


당연히 이런 것들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의미도 없다. 맛은 이 모든 경험을 종합하는 것이다. 이렇게 맛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몸 전체다. 단지 혀가 아니다. 음식을 먹는 체험은 그 체험의 요소 하나하나를 구분해 낼 수 없다. 그러니까 미식은 형태와 경계가 완전히 사라진, 대단히 디오니소스적인 예술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가 (1)편에서 하려고 했던 얘기였다. 우리는 위에서 요리가 예술이라면 다른 예술들과 구분되는 점은 어떠한 것이 있을까? 하고 물었다. 이제 예술 담론의 직선 위 어느 위치에 요리의 자리가 있는지 느낌이 올 것이다. 아마도 요리는 아폴론보다는 디오니소스 쪽으로 많이 치우친 예술인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들어가 보려고 한다. (2)편에서는 조금 더 무리를 하여 미식 행위를 더욱 디오니소스적 예술 체험 쪽으로 가깝게 끌고 가보겠다.


조선 팰리스의 유재덕 셰프는 "요리는 찰나의 예술이다"라고 말한다. 요리는 보존되지 않는다. 요리는 체험자에게 먹힘으로써 소멸한다. 즉 요리는 찰나에 존재한다. 셰프의 손을 떠나, 미식 체험자의 입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만 존재한다.


유재덕 셰프 ⓒInterpark


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는 죽음으로서 온전함을 획득한다고 말한다.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죽기 전까지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매 순간 존재하지만 존재 전체는 죽기 전까지 연속적이고, 우리는 아직 미래의 존재를 획득한 상태가 아니다. 즉 우리는 죽는 순간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유재덕 셰프는 "요리는 사라짐으로써 완성되는 예술"이라고 말한다. 요리는 체험자에게 먹힘으로써 완성되고, 요리의 경험은 오감을 통해 체험자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소멸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소멸로 완성되는 예술이 갖는 철학적 의미는 무엇일까? 조금 더 깊은 이야기가 될 수 있는데, 이 이야기는 (언제 쓸지 모르는) (2)편에서 해보도록 하겠다. 많은 좋아요는 (2)편의 등장을 앞당길 것이니 부디...




https://brunch.co.kr/brunchbook/like-foucault




https://brunch.co.kr/@iyooha/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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